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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경제 신간(新刊) 베껴읽기] <경제사상가 이건희> 허문명

입력 2021-11-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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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국의 산업사는 ‘Before 이건희와 After 이건희’로 나뉜다”고 단언한다. 늘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5년 뒤, 10년 뒤 삼성과 나라의 앞날을 고민한 경영자, 말 뿐이 아닌 행동과 실천으로 미래를 만들어 간 경제사상가로 평가한다. 이 책은 고인의 1주기를 기념해 생전에 그와 곁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지인들의 중언 등을 종합해 엮은 ‘이건희 타서전’이다. 저자 덕분에 다시금 이건희 회장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되어 반갑다.

 

 

* 한국을 변방에서 주류로 끌어올리다 - 저자는 이건희 회장이 ‘삼성’이라는 세계 초일류 기업을 일궈내, 변방의 대한민국을 글로벌 무대에 당당하게 주류로 서게 한 영웅이라고 평가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도 그의 부고를 전하면서 ‘선지자(Visonary)라고 썼다. 남들이 미리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앞날을 예언한 초인적 존재로 그를 평가한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이 회장이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한 취임사 대로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 20여 년만에 그 약속을 지킨 행동가이자 실천가라고 말한다. 이류, 삼류, 싸구려로 통하던 ‘메이드 인 코리아’를 글로벌 브랜드 반열에 올리는 과정에서 보여준 이 회장의 통찰력과 기업가 정신은 대한민국 국민과 기업인에게 세계 일류 DNA를 심어주었다고 평가한다.

 

* 기업인이 아닌 사상가로 - 이 회장은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했다. 시종일관 변화를 호소했다. 미래를 생각하면 식은 땀이 난다고 했다. 직원들에게 돈 잘 버는 기계가 되라고 주문하지 않고, 오히려 휴가를 쓰고 골프를 치고 출근하지 말하고 했다. 회장 자리에 한번 앉아보자는 생각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는 기업 내부에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비도덕적인 일이라고 했다. 그의 시선은 돈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5년간 안 바뀌면 회장직을 그만 두겠다”고 했다. 삼성의 변화에 자신의 청춘과 재산, 명예는 물론 목숨까지 걸었다고 말했다. 부귀영화보다는 명예와 성취감이 그를 움직이는 동인이었다.

 

* “삼성전자는 이미 망한 회사다” - 이 회장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삼성전자는 이미 망한 회사’,‘2류 기업’이라고 혹평했다. 모방에만 급급하고 세계 시장에서 싸두려 취급을 받고 있다고 뼈아프게 짚었다. 늘 ‘질’ 위주로 가라 했지만 아직도 양에 매달리고 있다고 질타했다. 삼성전자는 중병, 암으로 치면 2기 상태라고 경고했다. 삼성의 불량 제품을 암 세포에 비유했다. “이렇게 만들거면 삼성 이름을 반납하라”며 역정을 냈다. “일본 제품을 보면 삼성은 이대로 문 닫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까지 든다”고 말했다. 제품 불량은 기업과 그 나라 이미지까지 갉아먹으니 암세포와 다를 것이 없다고 꾸짖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암 3기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며, 당장 자금과 기술자를 투입해 회생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2000년까지 남은 7년 동안 죽기 살기로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누구 책임도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이 책임자라며, 자신이 직접 고쳐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 “두뇌산업으로 모든 것을 바꾸자” -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냄비 속 개구리론’을 펼쳤다. 이대로 가다간 끓는 냄비 속개구리처럼 무기력하게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돌파구로 ‘소프트경영’을 제시했다. 그는 1980년대 말에 소프트웨어 인재 1만 명을 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부랴부랴 채용했지만 몇 년 후에 보니 모두 엉뚱한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임직원들이 회장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손욱 전 회장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소프트경영을 주창했던 이 회장은 기업인 이전에 사상가이자 철학자였다”고 회고한다. 저자는 이 회장의 ‘소프트경영’이야 말로 한국 산업사를 비포 이건희와 애프트 이건희로 나누는 결정적 상상력이라고 평가한다. 미래의 경쟁력은 ‘보이는 것’을 만드는 경쟁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경쟁이며 이것이 소프트경영이었다. 이 회장은 ‘제2의 창업’을 두뇌산업으로 모든 걸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 신경영 선언의 방아쇠 ‘후쿠다 보고서’ - 이 회장은 일본인 고문 활용을 인사 항목에까지 넣어 명문화했을 정도로 그들을 아꼈다. “귀하게 모셔왔는데 썩히고 있다”며 경영진을 꾸짖기도 했다. 그는 1993년 6월 도쿄에서 후쿠다 다미오 디자인 고문 등 일본인 고문단과 대화를 나누면서 충격에 빠진다. 후쿠다 고문에게 직접 그동안 경험한 것들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추려 정리해달라고 요청했다. 기보 마사오 고문이 만든 보고서까지 두 개였다. 보고서 내용은 ‘삼성 직원들이 정리정돈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 회장을 더 절망에 빠트린 것은 마침 사내방송(SBC)이 내부 고발 프로그램으로 방영한 세탁기 조립 영상이었다. 불량난 제품을 생산라인 직원이 칼로 깎아 맞추는 모습을 보고 격앙했다. 불량품을 팔면서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것이 가장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일이라고 생각해 온 이 회장으로선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신경영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 삼성의 기술 발전을 함께 한 엔지니어링 출신 박정옥 전 에스원 대표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이 회장이 평소 목 놓아 강조했던 것의 연장선이었다”며 “이 회장은 1981년부터 삼성을 바꾸려 했고, 10여 년을 기다렸던 것”이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삼성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박근희 전 부회장은 그 어마어마한 개혁 드라이브를 삼성의 조직원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고 회고한다. 현명관 전 비서실장도 “처음에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며 “많은 이들은 이 회장이 이상적 가치만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고 기억한다. 잘못하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일인데, 이를 가장 잘 알만한 회장이란 사람이 선봉에 서서 그렇게 하자고 하니 난감해 했다고 전한다.

 

* 이 회장의 의지를 보여준 ‘스푼 사건’ - 모든 것을 바꾸자는 회장 말을 따랐다가는 실적이 떨어지고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과 우려가 컸던 사장단은 이 회장에게 공개적인 항명을 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첫날 특강 후 새벽에 이 회장이 사장 10여명을 방으로 불러 의견을 듣는 자리에서 이수빈 당시 비서실장이 총대를 맸다. 이 실장은 이병철 회장과 같이 일했고, 이 회장의 서울사대부고 4년 선배라 가장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회장님, 그래도 (삼성 같은 제조업체는) 양이 받쳐줘야 질이 올라가는 거 아닐까요. 아직은 양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쨍그렁 소리가 났다. 이 회장이 티스푼을 냅다 내려놓은 것이었다. 이 회장은 이 실장을 꾸짖음으로써 사장단의 군기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이수빈 실장은 물러나고 감사원 출신의 현명관 당시 삼성건설 사장이 비서실장에 오른다.

 

* “바꿔야 할 것은 삼성이 아니라 삼성인” - 이 회장은 제품 불량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의식 불량’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가 시종일관 강조한 변화는 ‘삼성 제품의 질’이 아니라 ‘삼성인의 질’이었다. 이 회장은 다가올 글로벌 경쟁시대에는 물건이 없어 못파는 ‘생산자 위주의 시장’은 가고, 고객의 까다로운 요구까지도 생산자가 수용해야 생존이 가능한 ‘소비자 위주 시장’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스푼 사건은 그런 면에서 전 임직원들에게 ‘과거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회장의 의지를 만방에 알린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 회장은 2000년에 한 인터뷰에서 “50년 이상 국내 정상의 위치를 누려오면서 굳어진 대기업병과 변화를 피해가려는 무사안일주의를 없애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변화의 방향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꺼번에 모든 변화를 이루려고 기대하기 보다는 쉬운 일, 간단한 일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갈 것을 주문했다. 문제는, 삼성인들이 이를 알고도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 몸이 바뀌어야 정신이 바뀐다 ‘7·4제’ - 이 회장이 신경영 선언의 실천으로 쏘아올린 신호탄은 전 직원의 출퇴근 시간 조정인 ‘7.4제’였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직후 1993년 7월 7일 일본 도쿄회의에서 오전 7시 출신에 오후 4시 퇴근제를 지시했다. 비서실마저 난색을 표했다. 당시 그룹 인사팀장이 현장의 애로사항을 들어 시행 시기를 조금이나마 늦추자고 했다가 “회장인 내가 임직원들 생각을 바꿔보겠다고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인사팀장은 안되는 이유만 늘어놓느냐”며 호통을 쳤다. 그는 7·4제를 통해 윗사람 눈치 보기를 깨라는 ‘권위주의 타파’를 주문하려 했다. 또 자기 계발에 힘쓰지 않으면 급변하는 시대에 뒤처진다는 ‘인재 중심 경영’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가정이 안정돼야 일도 잘 할 수 있다는 ‘가정 중시 경영’을 주창한 것이었다. 이 회장은 7·4제 실시를 T자형 인재 육성을 위한 조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 가지 분야에만 정통한 I자형 보다는 다른 분야까지 폭넓게 알고 있는 종합적 사고 능력을 갖춘 인재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7·4제는 단순히 출퇴근 시간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을 바꾸자는 보다 본질적인 주문이자,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의식 개혁 운동이었던 것이다.

 

* “일본에게라면 뭐든 지고 싶지 않았다” - 이 회장은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휴전이 되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평생 부모와 같이 지낸 시간이 3분의 1이 채 되지 않았다. 혼자 있던 시간이 많았던 탓에 낯가림이 심해 남 앞에 나서길 꺼려하게 됐다. 부모형제와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고민이 생기면 혼자 해결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골방에 들어가 문 걸어잠가 놓고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첫 해에는 일본말을 몰라 1년을 ‘꾸어먹었다’. 친구도 없고 초등학교 6년 동안 공부를 제대로 못해 기초도 없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술도 못 먹으니 혼자 있게 되고, 그러다 혼자 생각을 하면서 아주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가장 민간한 시기에 배고픔과 인종차별, 분노, 객지에서의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을 절절하게 느꼈다고 한다. 이 회장은 그래서 평생 “일본에게라면 뭐든지 지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상품은 물론이고 레슬링, 탁구 등 뭐든지 일본만 이기면 그렇게 기뻤다고 한다.

 

* 이건희의 ‘업(業)’ - 이 회장은 생전에 경영을 ‘종합예술’이라고 했다. 훌륭한 경영 뒤에는 탁월한 경영자가 있다고 했다. 21세기형 경영자는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고 유연한 조직 문화를 창조하며, 변화에 대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조직 내에 전파해야 한다며 ‘철학자적 경륜’이 요구된다고도 했다. 그가 내건 대표적 화두가 ‘업(業)의 개념’이다. 7·4제가 몸을 바꾸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머리를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리버사이드 호텔이 매물로 나왔을 때 매수를 검토해 보라는 회장 지시가 떨어졌다. 실무진은 영업 전망과 호텔신라와의 시너지 효과 등을 검토한 결과 ‘부정’ 의견을 냈고 매입 건은 백지화됐다. 얼마 후 이 회장은 “경영진이 호텔업의 특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질책 했다. 이 호텔이 강남과 강북이 맞닿은 요지에 있다는 점에서 부동산업 측면에서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호텔업을 장치산업이라고도 했다. 호텔에 들어가는 비품이 1300개 정도인데, 이걸 얼마나 잘 갖춰 놓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보험회사는 모집인(설계사)이 전부라고 했고, 신용카드업을 외상관리업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업’이라는 개념을 1993년 신경영 선언 훨씬 이전인 1989년에 처음 말하기 시작했다고 배종렬 전 제일기획 사장은 증언한다. 

 

* “수익보다는 업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 - 그는 하나의 업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사업을 영위하는 기본 정신과 목적은 무엇인지, 둘째 사업하는데 필요한 핵심기술과 제품 특성 그리고 유통 구조상 특성은 무엇인지, 셋째 관련 법규와 제도, 기술개발, 소비자 인식 변화 등 외부 여건의 변화는 어떤 것인지 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 가운데 규제를 업의 본질에 넣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흔히 규제는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규제를 처음부터 업의 본질에 넣고 일을 진행하라는 상상력이 신선했다며 감탄한다. 이 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이 업의 개념에 맞지 않게 일할 때는 수익을 내도 야단을 쳤다. 수익 내겠다며 오히려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야 말로 손실이라고 질타했다.        

 

* “만들지 않는 제조업의 시대가 온다” - 이 회장은 산업의 경계가 무너질 것이란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제조업이 서비스 산업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21세기 일류 컴퓨터 회사는 컴퓨터를 만드는 게 아니라고 했다. 고객 문제와 요구에 따라 컴퓨터 시스템을 설계해 문제를 헤결해 주는 서비스만 담당하고, 하드웨어는 외주로 해결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세계 1위 GE나 컴퓨터의 대명사 IBM도 앞으로는 서비스 기업으로 분류될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경영기술을 판매하는 방향으로 모든 사업의 서비스ㅘ를 진행 중인 GE의 사례를 예로 들며 “미래의 경쟁은 제품 만들기가 아니라 서비스 경쟁”이라고 설파했다. 자동차 역시 자동화된 대형 일관 체제를 갖추는 것 외에도 연구개발 시스템과 판매 네트워크를 기본으로 할부금융과도 유관한 산업 또는 비즈니스라 정의 내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첫 타임스퀘어 광고와 공항 카트 - 삼성은 1989년부터 세계를 향한 광고 전략을 수립한다. 혼신을 다한 첫 작업이 1992년 1월 7일 점등식을 한 뉴욕 맨하튼 타임스퀘어 광고였다. 이 때 이 회장은 실무진의 종합 보고를 들고는 상상도 못했던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우선 광고에 들어가는 제품들이 너무 많으니 줄이라고 했다. 옥외광고에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0.01초도 안될텐데 너무 제품 소개가 많으면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었다. 1000만 달러의 막대한 비용이 아까워 20여개 제품 이미지를 넣었는데 회장은 통신 분야로 집중해 5,6개로 줄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다음으로는 ‘제품’보다 ‘로고’를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삼성 로고를 확대해 계속 고정시켜 보여주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실무진들의 자존심이 꺾일 것을 우려해 자기 지적이 틀릴 수 있으니 미국 소비자와 전문가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해외 공항에 비치된 공항 카트에 삼성 로고를 찍어 광고하자고 한 것도 이 회장 아이디어였다. 세계 공항 카트의 70%에 삼성 로고가 붙었고 이는 삼성을 세계에 알린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평소에도 “제품이 아닌 이미지를 팔아라”라고 주문했다.        

 

* ‘빨리’가 아니라 ‘먼저’다 - 이 회장은 기술이 지배하는 ‘팍스 테크니카 시대’를 예견했다. 일반인들은 기술경영이라고 하면 최첨단을 먼저 떠올리는데 그는 기술경영의 요체를 ‘차별성’에서 찾았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 아무리 최첨단 기술이라도 그걸 다루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있어 고객의 시간 낭비를 얼마나 줄여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미 20년 전에 벌써 ‘속도’에 주목했다. 그런데 그가 강조했던 것은 ‘빨리’가 아니라 ‘먼저’였다. 우리의 ‘빨리 경쟁력’을 후발 개도국들이 답습해 추격해 오니, 우리는 지금부터 시간 경쟁력을 질적으로 한 단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빨리’를 기회를 선점하는 ‘먼저’의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가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먼저, 제때, 자주’였다. 그는 앞으로 기업 경영의 승패는 시간 자원을 누가 더 먼저, 더 빨리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 “ 디지털 기술에 적응하지 않으면 죽는다” - 이 회장은 1991년 3월부터 신임 임원들에게 기술중시경영 교육을 시켰다. 비 기술자는 기술을 알고, 기술자는 경영을 알아야 한다는 했다. 1992년에는 한 가지라도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초일류 상품을 만들라며 ‘1사 1품’을 특별히 지시했다. 그때까지 ‘삼성 기술상’을 반도체가 독차지하다가 그 해 통신분야가 TDX 교환기로 대상을 받았다. 이 회장은 30년 전에 이미 디지털 마인드로 무장된 경영자였다. 그는 실제로 “디지털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면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가올 미래에는 가짜가 진짜처럼 느껴지는 ‘가상의 세계’에 살게 될 것이라고도 예언했다. 미래는 디지털이 만드는 유토피아, 즉 디지토피아(Digitopia)라 단언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 승자가 되려면 지금부터 디지털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선정하고 그 육성에 국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중소 부품협력사에 갑질하지 말라” - 이 회장은 중소 부품업체와의 협력관계를 각별히 강조했다. ‘2인 3각’이라고 보았다. 전자업이 수많은 부품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조립산업인 때문이었다. 대부분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을 원가절감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시절에, 그는 그런 수직적인  일방적 거래는 대기업에도 큰 손실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품질 향상에 대한 동기부여가 적었기에 협력업체들의 불량률은 높고 납기지연은 당연하게 여겼다고 판단했다. 전체 원가의 50~60%를 협력사에 의존하는 상황이니 사업의 성패는 구매 단계에서 이미 결판이 난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라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갑(甲)으로 여겨지는 삼성이 갑질을 안하고 잘해주면 더 감동하지 않겠느냐”고 독려했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 중소기업인력개발원을 세워 중소기업중앙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 세계를 놀라게 한 ‘이건희 컬렉션’ - 최근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의 규모와 내용을 접한 미술인들은 하나 같이 이 고미술품들이 한국의 문회적 수준을 세계일류로 도약시키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회장의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사명감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20여년 동안 삼성가의 명품 컬렉션을 주도한 이종선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은 2006년 펴낸 <리 컬렉션>이란 저서에서 “삼성가가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에 따라 국보급 문화재 16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 개인이 국가 보물을 100점 넘게 갖고 있는 경우는 일본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적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의 수집 철학은 명품을 목표로 하되 일류를 모으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값을 따지지 않았고, 좋다는 전문가 확인만 있으면 별 말 없이 구매했다고 한다. 미술사학자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좋은 컬렉션의 네 가지 조건을 문화재와 미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 높은 안목, 결단력, 그리고 재정적 능력을 들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이 회장은 모든 조건을 갖춘 수집가였다. 이 회장은 자신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우리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알려야 한다며, 집무실에 작은 도자기 전시관을 만들기도 했다.

 

* 이병철-이건희 “문화재는 주인에게” - 이 회장의 문화재 수집은 “민족 문화유산을 더 이상 해외에 유출시켜선 안된다”던 부친 호암 이병철의 사명감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 회장 형인 이맹희 자서전에는 호암이 도굴꾼으로부터 문화재를 사서 원 주인에게 돌려준 사연이 소개되어 있다. 누군가 대구 동화사 석탑에서 도굴한 국보급 문화재를 사라고 가져왔고, 이걸 사지 않으면 일본으로 넘어갈 것이라 생각한 호암은 거액을 들여 산다, 그리고는 6,7년 후 동화사 주지스님에게 그 국보를 돌려주었다. 이건희 회장은 ‘한국 고고학계 100년 내 최대 성과’라는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지를 도굴꾼에게서 지켜낸 일화로 유명하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누군가 도굴한 물품이라며 국보급 고미술품을 팔려고 했다. 도굴군이 이걸 사주어야 도굴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럴 만한  돈이 없던 박물관 측은 전전긍긍했다. 이 때 이 회장이 흔쾌히 10억원을 내준 덕분에는 다호리 유적지를 지켜낼 수 있었다. 2000년 넘게 땅 속에 묻혀 있던 귀한 보물들이 여기서 대거 쏟아져 나왔다. 특히 붓과 삭도(칼 지우개)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한반도에서 문자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 지인들이 기억하는 이건희 - 이 회장의 고교 동창인 고 홍사덕 전 의원은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생각’이라기보다 ‘묵상’에 가까웠다”고 했다. 미국 치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과의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 안보가 튼튼해 진다든가,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사실상 나라를 좀먹는 존재라는 등 독특한 세상보기 안목에 압도됐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이 회장이 자신에게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며 그의 사람 보는 안목에 가장 압도되었다고 전했다. 이 회장과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삼성 법무팀장을 역임했던 인형무 변호사는 이 회장이 자신과 홍사덕 전 의원이 거쳐할 하숙집을 구해주고 경제적 도움을 주었던 일화를 전해 준다. 레슬링을 했던 이 회장이 친구들을 괴롭히는 학교 일진들을 때려눕혔던 무용담도 전한다. 이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집념이 대단했다고 기억하는 그는 “그는 기술에 해박했다는 점에서 공학자이기도 했고, 본질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철학자이기도 했으며, 역사와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점에서 문화인류학자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 일본 관계자들이 기억하는 이건희 - 기보 마사오 고문은 오디오 고문을 맡아 30여년 동안 삼성전자에서 일했다. 처음 삼성에 왔을 때 삼성의 기술 수준은 엉망이었다고 한다. 1년에 4~5회 이 회장을 만나 기술적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 회장이 세계 1등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갖고 있었으며, 일단 일본부터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그는 삼성의 가장 큰 성공 비결로 이 회장의 ‘집념’을 들었다. 이 회장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집념의 사나이’라고 칭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병철과 이건희를 함께 오랫동안 보았던 야마자키 가쓰히코 전 니혼게이자이 서울 특파원은 삼성의 강점을 ‘뭐든 빨리 결정하고 그것에 전력을 다해 몰두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혼돈한 상태를 깨뜨려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파천황’적인 분이었다”고 극찬한다. 그와 호암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정말 진심이었다며, 일본 캐논의 미타라이 회장도 이 회장이 매우 뛰어난 경영자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대단했던 분이라고 칭찬한 적이 있다고 전한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5@na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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