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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공간이 주는 울림, 아로새기다

[브릿지경제의 ‘신간(新刊) 베껴읽기’] 기억해야 할 역사를 찾아서…

입력 2022-12-31 07:00 | 신문게재 2022-12-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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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에 세워진 청동상 ‘비설(飛雪)’. 4.4 사태 때 토벌대의 추격을 피하지 못해 차디찬 눈 밭 속에서 죽임을 당한 모녀의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억 혹은 추억의 공간을 지니고 산다. 지역이든 특정 건축물이든,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 그런 공간에서 삶의 의미와 교훈을 찾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김종훈의 <세계 현대건축 여행>과 김명식의 <공간, 시대를 기억하다>는 저마다 가진 기억의 공간 중에서 특히 역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만한 곳들을 소개한다. 오랜 코로나 탓에 발이 묶였던 여행 길이 다시 뚫리고 있다. 저자들이 소개하는 국내외 ‘기억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가 본다.



◇ <공간, 시대를 기억하다> … ‘다크 투어리즘’ 속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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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에 세워진 모녀상 ‘비설(飛雪)’. 토벌대를 피해 두 살배기 딸을 업고 거친 오름을 오르며 달아나다 총에 맞아 눈밭에 쓰려져 생을 마감한 한 모녀의 넋을 기린 조각품이다. 2007년 12월 20일에 실제 크기의 청동상으로 이곳에 세워졌다. 바닥의 백색 대리석은 당시의 차디찼던 하얀 눈밭을 연상케 한다. 제주석을 사용한 달팽이 모양의 돌담 초입 벽에는 제주 전래의 자장가 ‘웡이자랑’이 띠 형태의 오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모녀의 비통한 죽음을 더욱 처연하게 느끼게 해 준다.


영동군 노근리의 쌍굴다리는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피난민 300여 명이 미군 비행기와 기관총으로 떼죽음을 당했던 현장이다. 지금은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2001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공식 유감 표명을 하기 전까지 ‘노근리’는 금기어였다. 지금도 굴다리 주변에는 탄환 박힌 곳은 세모, 흔적만 남은 곳은 동그라미, 명확치 않은 곳은 네모 표시가 되어 있다.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8년부터 ‘오월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부산 서면 쌈지공원을 시작으로 목포역 광장과 서울 명동성당 앞,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 경기도청 앞, 서울 기독교회관 앞에 차례로 세워졌다. 목포역 앞에는 5.18 희생자 수에 맞춰 164개 기둥이 동그란 콘크리트 걸상을 떠받치고 있다. 서울 명동성당 앞 오월걸상은 제기(祭器) 모양이다. 경기도청 앞에는 홍성담 화백의 판화 ‘횃불행진’을 하안 마천석에 새기고 바닥의 흰 돌은 거창돌로 깔아 영호남 화해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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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3호선 안국역 입구의 ‘100년 계단’. 3.1만세운동 100년을 기념해 지난 2019년 이곳에19190301에서 시작해 20190301로 끝나는 100개의 계단을 조성했다.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은 ‘독립운동 테마역’이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에 조성됐다. 4번 출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새겨진 ‘100년 하늘문’이 보인다. 스크린도어에는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임시정부 요원들의 얼굴과 어록이 새겨져 있다. 19190301에서 시작해 20190301로 끝나는 ‘100년 계단’도 만난다. 한 쪽 벽에는 기미독립선언서가 빼곡하게 적혀 있고, 팔각형의 ‘100년 기둥’에는 유관순 등 열사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는 매일이 3월 1일이다.

서울시가 서울역 광장 앞에 ‘서울로7017’을 조성하면서 기존 고가도로의 만리동 방향 끝자락에 ‘윤슬’이 자리했다. 도시화로 사라진 유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든 구조물이다. 지름 25미터에 깊이 4미터 크기의 움푹 패인 원형 땅에 거울 같은 보가 일정하게 놓인 특이한 조형물이다. 윤슬이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란 뜻이다. 빛을 산란하게 하는 루버와 공간을 에워싸는 특유의 내림 층계가 독특한 공간감을 발산한다. 밤에는 ’우물에 뜬 달빛‘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 <세계 현대건축 여행> … 역사와 문화의 상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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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테러 때 무너진 뉴욕 쌍둥이 빌딩 자리에 ‘9.11 메모리얼 파크’가 세워졌다. ‘부재의 반추(反芻)’다. ‘그라운드 제로’와 ‘9.11 메모리얼 파크’가 당시의 참사를 기억케 해준다. 쌍둥이 빌딩 자리에 세워진 두 개의 초대형 사각형 인공폭포는 쉼 없이 그날의 눈물처럼 물을 쏟아낸다. 주변 난간에는 2983명의 당시 희생자 이름을 동판에 새겼다. 참나무 400그루가 촘촘한 조경 숲에는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배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띈다.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길 갈구하는 심정이 담겼다.


옛 동베를린 지역에 세워진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역사적 화해’ 프로젝트로 추진됐다. 하지만 건축가가 유대인이라는 앞뒤 안 맞는 이유로 건립 계획이 취소 위기를 겪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9년 1차 개관식 때 당시 슈뢰더 총리가 건축가의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화해’가 이뤄졌다. 칼로 길게 찢겨진 듯한 형상의 창문은 유대인들의 고통을, 지그재그로 9번이나 구부러진 지붕은 ‘다윗의 별’을 떠올리게 한다. 출입구가 없어 옆 옛 유대인박물관의 지하통로를 이용해야 한다. 고립된 슬픔의 역사를 투영한 디자인이다. ‘기억의 공간’ 홀에는 사람 얼굴 모양의 1만여 개 철제 형상을 밟을 때마다 희생자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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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화해’를 상징하는 프로젝트로 옛 동베를린 지역에 세워진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는 ‘기억의 공간’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바닥에 깔린 사람 얼굴 모양의 1만여 개 철제 형상은 관람객들이 밟고 지날 때마다 당시 유대인 희생자들의 절규를 쏟아내는 듯한 소리를 낸다.

 

퐁피두 센터는 빈민가의 폐공장을 도심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켜 파리를 다시 최고의 문화도시로 끌어올린 건축물이다. 소장 미술품과 전시 콘텐츠도 좋지만, 건축물 자체로 파리의 창의적 실험정신을 그대로 담았다. 특히 이 거대한 철골 구조물은 안과 밖이라는 공간의 기본개념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화장실과 방화 셔터를 빼고는 모든 구조물들을 밖으로 배치했다. 덕분에 축구장 두 배 크기의 완벽한 내부 공간이 탄생했다. 건물 외벽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투명한 대형 에스컬레이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최상층 전시 공간은 최상의 전망대로, 파리의 저녁 풍광이 일품이다.

스웨덴 도시 말뫼는 친환경 도시개발 프로젝트의 교과서로 불린다. 우리에겐 ‘말뫼의 눈물’ 이야기로 낯이 익다. 1970년대 세계 최고 조선소였다가 도시의 흉물이 된 코쿰스 조선소를 ‘내일의 도시’라는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살려낸 것이 ‘터닝 토르소’다. 남자 상반신이 90도로 돌아간 독특한 형상이다. 지상 54층 어디에서든 탁 트인 시야가 확보된다. 층마다 1.6도씩 회전하면서 상승하는 형상이다. 최상층에 이르면 90도가 뒤틀린 모습이다. 2800개 패널과 2500개 창으로 이뤄진 외벽 곡면이 이채롭다. 이 건물 덕분에 말뫼는 6만 개가 넘는 일자리가 생기고, 평균 연령 36세의 젊은 도시로 거듭났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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