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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지리산에 뿌리 내린 경의사상, 하늘에 닿다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⑤산청

입력 2021-08-03 07:00 | 신문게재 2021-08-03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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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와 왼쪽 멀리 보이는 지리산. 사진=남민

도가 없는 세상에선 재주를 숨겨라 ‘무도즉은(無道則隱)’

子(자) 왈曰, 篤信好學(독신호학) 守死善道(수사선도) 危邦不入(위방불입) 亂邦不居(난방불거) 天下有道則見(천하유도즉현) 無道則隱(무도즉은) 邦有道(방유도) 貧且賤焉(빈차천언) 恥也(치야) 邦無道(방무도) 富且貴焉(부차귀언) 恥也(치야).

공자께서 “확고한 믿음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며 목숨을 걸고 올바른 도리를 지켜야 한다.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어지러운 나라에선 살지 말라.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오고 도가 없으면 조용히 숨어라. 나라에 도가 있는데 빈천하면 수치스럽고, 도가 없는데 부귀를 누린다면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셨다.
 

◇ 임금에게도 호통을 친 꼿꼿선비 조식의 ‘무도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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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 세심정. 사진-남민

‘은(隱)’은 도피가 아니다. 좋은 때에 잘 쓰이기 위해 더러운 때를 묻히지 말라는 말이다. 도가의 은자(隱者) 역시 그런 뜻이다. 공자도 “현명한 사람은 도가 없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한다”는 ‘현자피세’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런 이를 ‘일민’, 즉 도가 서지 않은 세상을 피해 살며 절의와 행실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칭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무도즉은’의 참 실천자로 꼽힌다. 평생 벼슬을 등지고 초야에 묻혀 살던 1566년 명종(明宗)이 66세인 그를 상서원(尙瑞院, 5품 판관)에 제수하자 경상도 산청에서 마지못해 올라왔으나, 임금이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를 계속 거론하며 왕명을 받들지 않은 그를 책망하자 “소신은 헛된 이름만을 훔쳐 임금을 기망할 수 없었기에 빨리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답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벼슬에 뜻도 없었지만 임금에게서 ‘도’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야의 선비였지만 남명은 허황된 이름으로 녹을 받는 벼슬아치와 국정을 어지럽히는 왕과 측근들을 목숨을 걸고 질타했다. 그의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는 과연 이것이 임금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과격하다.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가졌으며 하늘의 뜻도 민심도 떠나버렸습니다. (중략) 자전(慈殿, 문정왕후)은 생각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어 돌아가신 선왕의 고아(孤嗣)일 뿐입니다.”

감히 모후인 문정왕후를 ‘과부’라 했고, 왕을 ‘고아’라 했다. 22살의 임금이 크게 화를 내며 남명을 엄벌하려 했지만, 대신들이 “송나라에서도 이러한 구절의 전례가 있었다”며 극구 만류해 화를 피했다. 남명은 오히려 왕조차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강단 있는 선비로 부상했다.
 

◇ 경(敬)과 의(義)를 중시한 남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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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선생이 늘 휴대했던 경의검. 사진=남민

남명은 도가 서지 않은 나라에서 벼슬에 나아가 결국 권력자에 이용만 당하고 이름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영원히 ‘처사(處士)’로 남고자 했다. 자신의 사후 칭호도 ‘처사’로 쓰게 했다. 조선 500년 역사상 처사의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다. ‘처사’는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과 자기수양을 하던 선비를 일컫는다.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 등이 대표 인물이다. 선비들에게는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거나, 대제학이 되거나, 문묘 배향자가 되는 것보다 영예로운 일로 여겼고 누구나 그 호칭을 얻고자 했지만 대부분 선비들이 현실적 이득을 위해 벼슬을 택했다.

남명은 1501년에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5세까지 이곳에서 자라다 부친이 벼슬길에 나가면서 서울 장의동(현 서촌)에서 살았다. 18세 때 이웃에 살던 청송 성수침(成守琛)을 만나면서 인생의 진로가 바뀐다. 성수침은 기묘사화 후 두문불출하는 시은(市隱, 도시 속 은둔자)의 삶을 살며 세속의 욕망을 멀리하고 아들 우계 성혼(成渾)과 그의 친구 율곡 이이(李珥) 등 후학을 양성했다.

같은 해에 태어난 퇴계 이황과는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서로를 존중했다. 퇴계가 벼슬길에 나오라고 편지로 권했을 때도 남명은 “헛된 이름이나 훔쳐 남을 속이려는 자들을 대신 꾸짖고 타일러 달라”며 사양했다. 둘 다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남을 분명히 했고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가슴에 품었다.

퇴계처럼 남명 역시 노년으로 갈수록 학문의 깊이는 물론 나라를 걱정하고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더욱 애절했고 강력했다. 선조에게 남명은 어지러워진 정치와 형법, 땅에 떨어진 도덕, 혼란한 인사정책, 텅 빈 곳간과 허술한 국방을 질타하는 사직장(辭職狀)을 올렸다. 우려처럼 2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순자>편을 인용해 부(賦)를 지어 올렸다. “배는 물 때문에 다닐 수 있지만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네. 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 옛날부터 있어 왔다네. (중략) 임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편안하게 되기도 하고, 위태롭게 되기도 하나니.”

남명 사상의 핵심은 ‘경의(敬義)’다. 그는 항상 칼을 차고 다녔다. 문무겸비의 상징이기도 했다. ‘내면의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敬)이고, 밖으로 결단을 내리는 것이 의(義)다’라는 검명으로 자신을 연마했다. 이러한 수련이 군왕에게도 당당하게 호통칠 수 있게 했다. 남명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산청에 들어와 지은 산천재(山天齋)에 많은 후학들이 몰려왔다. 그 후학 곽재우(郭再祐)나 정인홍(鄭仁弘) 등은 의병장이 되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다. 이론적 학문이 아닌, 실천을 중시했고 병법을 가르친 덕분이다.

남명은 말년에 선조 임금의 간곡한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72세에 병이 심해지자 어의까지 내려보냈으나 도착하기 전에 숨졌다. 평소 자신이 정해둔 산천재 뒷산에 장사 지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됐다.
 

◇ 조식의 ‘산천재’… “덕은 날로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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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 전경. 사진=남민

지리산은 3개도, 5개 시군에 둘러싸인 백두대간의 종착역이다. 많은 선비들이 유람을 즐겼지만 남명만큼 지리산을 사랑한 이도 드물다. 그는 지리산을 10차례 이상 올랐다. 그중 58세 때인 1558년 4월 11~25일의 14박 15일 여정은 유일하게 ‘유두유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기로 남겼다. 워낙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선비이었기에 이 하나도 다행스럽다.

조식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살며 호를 남명(南冥)이라 지었다. 48세에 다시 합천 토동으로 돌아와 12년간 살다 61세에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군 덕산으로 옮겨 줄곧 초야에 묻혀 살았다. 산천재는 남명 말년의 강학 공간이었다. 주역에서 유래한 ‘산천(山天)’은 64괘 중 간괘(艮卦)와 건괘(乾卦)가 겹쳐진 형상을 이루는 괘다. ‘대축은 강건하고 독실하여 빛남이 날로 새롭다. 하늘이 산속에 있는 것이 대축이니,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옛 성현의 말씀과 행동을 많이 익혀 그 덕을 쌓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명은 산천재 창에 ‘경(敬)’자와 ‘의(義)’자를 붙여두고 수양했다. 이곳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했지만 퇴계의 후학인 약포 정탁(鄭琢)과의 인연은 남다르다. 정탁이 이웃 진주향교 교수로 왔다가 떠나기 전 하직 인사를 왔는데 남명이 소 한 마리를 선물로 주며 타고 가라 했다. 정탁이 어리둥절해 하자 그는 “자네는 말이나 기질이 너무 민첩하네. 묵묵하고 꾸준하게 행동해 원대한 경지에 나아가도록 하게. 이 소처럼 말일세”라고 말했다. 큰 가르침을 받은 약포 정탁은 훗날 나라를 구할 위인을 사지에서 살려낸다. 바로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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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대. 사진=남민

산천재는 봄에는 하얀 매화, 여름에는 분홍빛 배롱나무꽃으로 아름답다. 이 매화는 ‘남명매(南冥梅)’로 불린다. 산천재는 북쪽에서 덕천강이 내려오고 서쪽에서는 지리산 중산리 계곡에서 발원한 시천천이 합류해 동류하는 지점에 있다. 덕천강은 진주 남강으로 합류한 후 낙동강으로 흐른다.

남명 선생은 산천재 뒷산에 잠들어 있다. 바로 아래엔 남명기념관과 신위를 모신 가묘(家廟) 여재실(如在室)이 나란히 있다.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덕천서원이 있다. 1576년 선생 사후 4년 뒤에 후학들이 덕산서원으로 세운 후 광해군 때 사액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처음 덕산의 이름을 가졌을 때 도산의 퇴계 이황, 옥산의 회재 이언적과 함께 ‘삼산(三山)’의 하나로 규모와 명성을 가졌다. 서원 앞쪽 도로 건너편에 세심정(洗心亭) 정자가 있어 시천천 맑은 물에 흐트러진 마음을 씻을 수 있다. 그 밖에 남명 선생의 유적지로 입덕문과 탁영대 등이 있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산청의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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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예담촌 부부 회화나무. 사진=남민

산청은 해발 1915m의 지리산 천왕봉을 가진 명승의 고장이다. 천왕봉과 바로 아래쪽 법계사를 비롯해 지리산 동쪽 기슭에는 많은 사찰이 있다. 내원사는 1300년 전 덕산사가 창건된 터에 다시 지은 사찰로 수많은 전설과 유적을 가진 불국토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한 대원사에서는 조선 시대에 사리 72과가 나왔다고 한다. 산청의 서쪽에 지리산이 있다면 동쪽에는 5월 철쭉이 온 산에 융단을 펼치는 황매산이 있다.

고려 시대 문익점의 목화씨 이야기는 바로 산청 면화 시배지에서 시작된다.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화 씨앗을 가져와 고향인 이곳에 심은 시배지가 단성군 사월리에 있다.

산청에는 또 한 명의 위인이 있다. 성철 스님이다. 면화 시배지 앞 남강 묵곡교 너머 단성군 묵곡리에 성철 대종사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성철 스님은 대원사와 인연을 맺고 출가해 1981년 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당시 추대식에 참석하지 않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남겨 화제가 됐었다.

조선의 명의 허준(許浚)이 산청에 와서 의술을 배웠다 하여 산청군에서는 ‘동의보감촌’을 조성해 매년 한방·한의학 축제를 연다. ‘아름다운 우리의 옛 담 마을’이라는 뜻의 남사예담촌은 한옥 고택의 아름다움과 향토의 맛으로 정겨운 마을이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높아, 공자를 태어나게 한 이구산(尼丘山)을 이곳 마을 산에도 그대로 부르고 있다.

오래된 역사 유적도 있다. 가야 제10대 임금의 무덤으로 전하는 구형왕릉이 있다. 바로 김유신의 증조부다.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가야 마지막 왕을 한 인물이다.

글·사진=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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