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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王 스승으로 추천" 퇴계가 인정한 유일한 후배 '고봉 기대승'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⑥광주

입력 2021-08-10 07:00 | 신문게재 2021-08-1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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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월봉서원
고봉 기대승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월봉서원. 사진=남민

 

선배보다 더 유능한 후배를 기다린다 ‘후생가외(後生可畏)’

 

子曰(자왈), 後生可畏(후생가외) 焉知來者之不如今也(언지래자지불여금야) 四十五十而無聞焉(사십오십이무문언) 斯亦不足畏也已(사역부족외야이)

 

공자께서 “젊은 후배란 두려운 존재다. 장차 올 그들이 어찌 지금의 우리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나이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명성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이는 그다지 놀라워할 것이 못 된다”라고 하셨다.

 

 

◇ 퇴계가 인정한 기대승의 ‘후생가외(後生可畏)’

 

광주-월봉서원 사단칠정 편지
퇴계 이황과 주고 받은 사단칠정 편지. 사진=남민

 

‘후생(後生)’은 나중에 태어나 아직 경험과 학식이 부족한 후배들이다. 먼저 태어나고 학식을 갖춘 자가 ‘선생(先生)’이다. 공자의 ‘후생가외’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것인데, 젊어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기대할 것도 못 되니 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뜻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즉 부단한 노력으로 선배가 이루어 놓은 그 이상의 결과를 내놓으라는 가르침이다.

공자가 후생가외로 지목한 사람은 제자 안회(顔回)였다. 공문십철(孔門十哲) 애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했다. 노나라 애공이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는지 묻자 “안회가 배우기를 좋아합니다”라며 치켜세웠다. 공자는 안회가 단명으로 죽은 후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조선조에서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그런 사람이다. 퇴계 이황이 인정했던 후학이다.

스무 살도 안 된 선조 임금은 스승인 퇴계 이황마저 떠나려 하자 그에게 후임자를 추천해 달라고 청했다. 이때 퇴계는 류성룡 정탁 이이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눈에 밟힌 가운데 고봉 기대승을 천거했다. “문자(文字)를 많이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조예가 가장 높으니 통유(通儒)입니다”라고 극찬했다. “얻기 쉽지 않은 사람”이라고도 말했다. 조선 최고의 학자가 ‘가장(最), 통유’라는 표현까지 쓴 유일한 후생이다.

행주 기 씨 고봉 기대승(1527~1572)은 광주(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났다. 조상은 대대로 서울과 인근에 거주했지만 아버지 물재 기진(奇進)은 동생 복재 기준(奇遵)이 기묘사화에 연루돼 목숨을 잃자 세상을 뒤로 하고 광주로 내려가 터를 잡고 살다 고봉을 낳았다.

숙부의 죽음을 알게 된 기대승은 과거시험 공부에 연연하지 않고 위기지학의 학문에 힘썼다. 조정에서 일할 때도 세속을 초월했고 행동은 오로지 퇴계를 본보기로 삼았다. 올곧은 성격으로 쉽게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퇴계 선생에게만은 마음 속으로 복종했다.

 

고봉은 후왕들도 탄복한 지식인이었다. 효종은 1655년 제문을 보내며 “문정공 조정암(조광조) 선생이 돌아가신 후 도가 황폐해졌으니 이황이 계승하여 창도하였는데 진실로 뿌리와 줄기가 되었다가 경(卿, 기대승)께서 도와 좌우로 접하여 바른길로 인도하였도다”라고 했다. 정조도 1788년 제문을 올리며 “선배도 두려워하였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라고 칭송했다.

고봉은 제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호남 성리학의 토대도 구축하지 못했지만 그의 이론은 율곡에 의해 기호학파에 흡수된다. 고봉이 사망하던 1572년 율곡은 우계 성혼과 뒤이어 1년 동안 9차례의 사단칠정 논쟁을 이어갔다.


◇ 한국 유학사에 빛나는 퇴계-고봉 ‘사단칠정 논쟁’

 

광주-월봉서원 고봉집
월봉서원에 보관 중인 고봉집. 사진=남민

 

퇴계와의 인연은 고봉이 1558년(명종 13년) 32세 때 과거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오른 그달부터 시작됐다. 고봉은 당시 서울에서 퇴계를 방문해 처음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을 토론했다. 사회 초년생이 58세의 원로 대학자인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사회 질서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봉은 추만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에서 사단칠정 내용을 퇴계가 수정한 것에 반박했다.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사단(四端)과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칠정(七情)에 대해 퇴계는 “사단은 ‘이(理, 이치·만물의 원리)’에 속하고 칠정은 ‘기(氣, 기질·원리)’가 구현된 실체에 속한다”며 둘을 나눈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했고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이 같은 것이니 나누어서는 안 된다”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맞섰다.

‘후생가외’ 고봉에게 대선배 퇴계도 움찔했음은 물론이다. 오랜 토론 끝에 퇴계는 고봉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 “사단은 이치가 발동하나 기질이 따르고 있으며, 칠정은 기질이 발동하나 이치가 타고 있다”로 보완했다. 둘의 주장을 절충한 것이다. 원로에게 대든 고봉, 그를 인정하고 받아준 퇴계 모두 범상치 않다. 이후로도 둘은 뜨거운 논쟁을 이어갔지만 서로 예는 극진히 갖췄다. 퇴계 없는 고봉은 없었을 것이고, 고봉 없는 퇴계 역시 성리학의 섬세한 부분까지 다 다듬지 못했을 것이다.

논쟁은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간 편지로 이어졌다. 조선 유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학문적 토론으로 평가 받는 논쟁이다. 서신에는 사단칠정뿐 아니라 서로의 고향인 안동과 광주에서의 삶과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도 있어 서로를 중하게 여기는 최고 인격자들의 교유(交遊) 방식을 잘 보여준다.

둘의 이별도 각별했다. 1569년 3월 퇴계가 마지막으로 낙향할 때 동호(東湖, 옥수동 앞 한강)에서 함께 자고 다음날 강을 건너며 시를 주고 받았고 봉은사(奉恩寺)에서 하루 더 묵으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이듬해 퇴계의 부고를 받은 고봉은 통곡했고 도산에 사람을 보내 조문한 후 묘갈명서(墓碣銘序)를 직접 짓고 묘지(墓誌)까지 지어 스승에 예를 갖췄다. 고봉도 이태 뒤 1572년 46세 때 고향으로 가던 중 천안에서 생긴 병으로 태인(전북 정읍)에서 생을 마쳤다. 선조 임금은 덕원군(德原君)으로 봉하고 문헌공(文憲公) 시호를 내렸다.


◇ 혜성처럼 나타나 긴 여운을 남기다

 

광주-월봉서원 빙월당
월봉서원 내 빙월당 전경. 사진=남민

 

기대승의 학문적 토양은 고향 광주다. 광산구 백우산(白牛山) 남쪽 임곡동과 두정동이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비교적 짧은 인생을 마감했기에 광주에 고봉의 유적은 많지 않다. 대표적인 곳은 백우산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광산구 광산동에 있다. 원래 영산강 변 산월동에 세운 것을 이전해 왔다. 그곳의 작은 봉우리에 달이 뜨니 ‘월봉(月峯)’이라 했다. 효종 임금 때 이름이 정해지며 사액서원이 됐다.

흥선대원군 때 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1941년 종가 터가 있던 지금의 광산동에 빙월당(氷月堂)을 지으면서 새롭게 태어났다. 빙월당은 영조 때 초건했던 강당이다. ‘빙월’은 1655년 효종이 고봉을 기린 제문에서 ‘그대의 정신은 잘 단련된 금과 같고 윤택한 옥과 같으며, 맑은 수월(水月)과 같고 결백한 빙호(氷壺, 옥항아리 속의 얼음처럼 맑은 마음)와 같도다’라고 한 데서 따왔다.

월봉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빙월당이 있다. 고봉의 문집과 학문,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좌우 측으로 존성재(存省齋)와 명성재(明誠齋)라는 기숙사가 있다. 현판 글씨가 모두 동춘당 송준길의 작품이다. 왼편 장서각에는 고봉의 문집 판각 등이 보관돼 있다. 뒤쪽 내삼문을 들어서면 숭덕사가 있다. 고봉의 사당으로, 매년 3월과 9월에 향사를 지낸다. 서원 옆에는 고봉 신도비 백우정이 있다. 주차장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산길로 오르면 고봉 선생의 묘소가 있다.

 

광주-월봉서원 고봉 선생 묘소
고봉 기대승 선생의 묘소. 사진=남민

 

그 위쪽으로 고봉이 지은 귀전암(歸全庵) 터가 있다. ‘귀전’은 ‘부모가 낳아준 몸을 온전하게 보전해 돌아간다’는 뜻으로, <효경>에 심취했던 기대승의 효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장남 함재 기효증(奇孝曾)이 아버지의 묘소에 시묘하던 ‘칠송정’이 있다. 훗날 정자를 짓고 7그루 소나무를 심어 이렇게 불렀다.

고봉이 태어나 자란 광산구 두정동에는 그가 심었다는 50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 두 그루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봉이 44세에 한양에서 내려와 ‘낙암(樂庵)’을 짓고 퇴계에게 자랑까지 했던 유적을 온전히 볼 수 없어 안타깝다. 퇴계가 ‘낙암’ 액자와 ‘낙암기’를 지어 보낼 정도로 두 사람의 우정이 담긴 곳이다. ‘낙암’은 퇴계가 편지에서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겨야 한다’고 한 글에서 ‘낙(樂)’자를 따온 것이다. 퇴계 선생도 얼마나 흡족해 했을까.

 

 

◇ 함께 둘러보면 좋을 광주의 명소

 

광주-양림동 우일선 선교사 사택
광주 양림동에 위치한 우일선 선교사 사택 전경. 사진= 남민

 

▲무등산 = 1187m 높이의 무등산(無等山)은 지리산 서쪽 호남 땅에서는 ‘가히 등급을 매길 수 없는 독보적인 산’이라 해 무등산이다. 201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정상 부근의 서석대, 입석대로 불리는 주상절리 기암괴석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푸랭이수박’이라 부르는 무등산 수박이 유명하다. 명찰 증심사(證心寺)는 통일신라 철감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오백나한전이 유명하다.

  

광주전통문화관 = ‘예향(藝鄕)’ 광주의 전통을 계승하는 곳이 증심사 입구의 광주전통문화관이다. 동구청 근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 각국 문화의 향기를 체험할 수 있는 세계적 복합문화공간이다.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은 미국 선교사들이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운 곳으로 ‘광주의 예루살렘’으로 불린다. 오웬기념각, 광주양림교회, 수피아여고, 우일선(Wilson) 선교사 사택 등 선교사들이 남긴 역사적 유물이 많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호수생태원 전경. 사진-남민

 

국립 5.18민주묘지 = 국립 5.18민주묘지는 ‘5월 항쟁’의 상징이자 민주화의 성지다. 금남로의 민주광장, 민주화운동기록관, 자유공원 등도 있다. 광주호 호수 생태원은 요즘 각광받는 에코 여행지다. 무등산 북쪽 담양군과 경계해 호젓한 전원풍을 만끽할 수 있다. 인근에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해 왜군을 격파했던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생가가 있다.

 

환벽당 = 생태원 근처에는 호남 누정문화의 일원인 환벽당이 있다. 조선 중기 나주 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金允悌)가 지은 정자다. 송강 정철(鄭澈)이 소년 시절 그의 제자로 과거 급제하기 전까지 약 10년을 공부한 곳이다. 개울을 경계로 환벽당 쪽이 광주고 건너편이 담양이다. 그곳은 정철의 후광으로 ‘담양군 가사문학면’이라는 행정지명을 갖고 있다. 소쇄원·식영정 등 호남 최고 명성의 정자들이 있다. 환벽당 아래쪽엔 또 하나의 정자 취가정(醉歌亭)이 있다.


글·사진=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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