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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삼정문란 시대… 다산, 글로 '청백리 정신' 새기다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⑧강진

입력 2021-08-24 07:00 | 신문게재 2021-08-24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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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초당
다산초당 전경. 사진=남민

 

‘윗사람이 탐욕 버리면 백성은 도둑질 않는다’ 불욕부절(不欲不竊)

 

季康子患盜(계강자환도) 問於孔子(문어공자) 孔子對曰(공자대왈), 苟子之不欲(구자지불욕) 雖賞之不竊(수상지부절)

 

계강자가 도둑이 많음을 걱정하여 조언을 구하자 공자께서 “진실로 선생(지도자)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백성은 상을 준다고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셨다.

 

 

◇ 정약용의 ‘불욕부절(不欲不竊)’

 

강진만
강진만 전경. 사진=남민

 

계강자(季康子)는 노나라 군주 애공 때의 대부(大夫)로 국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며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둬 부를 축적했다. 자신이 큰 도둑이었지만 백성이 도둑질하는 것은 두고 보지 못했다. 공자는 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게 됨을 충고한 것이다.

공자는 각자 자기 위치에서의 역할이 있는 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라고 했다. 윗사람의 행실에 선하고 명분이 서야 백성이 믿고 따르는 법.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후기 최고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불욕부절(不欲不竊) 실천의 주인공이자 채찍을 든 인물이다. 그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 온 지 3년째인 1803년에 쓴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는 무법천지 속 당시 백성들의 피폐한 삶에 대한 슬픔이 그대로 녹아 있다. 삼정문란으로 썩어 들어간 나라에 대한 개혁의 외침이었다.

갈대밭에 사는 농민이 아이를 낳자 사흘 만에 군적에 올라가고, 마을 이장이 와서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간다. 농민은 아이 낳은 죄로 소를 잃었다며 자신의 양경을 칼로 잘라버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억울한 현실을 그는 뒷날의 거울로 삼고자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짓고 ‘애절양’ 시를 수록했다.

앞서 33세에 경기도 암행어사 때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적성의 시골집에서 짓다’라는 시를 남겼다. 놋수저는 이장에게 빼앗기고, 다섯 살에 기병에 오른 큰 아들과 세 살에 군적에 묶인 작은 아들의 군포세를 바치느라 하루 한 끼 겨우 풀칠하는 백성들의 죽지 못해 사는 현실을 임금께 보고했다.

이때 정조의 최측근으로 고을 수령을 했던 김양직과 강명길을 단죄하는 건의를 올려 임금을 깜짝 놀라게 했다. 두 사람 모두 왕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악행을 일삼았던 이들이다. 다산은 “법을 적용할 때는 마땅히 임금의 최측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라며 소를 올렸고 정조는 고민 끝에 이들을 단죄했다.


◇ 명예롭게 살다 빛나게 죽은 개혁가

 

강진 다산박물관
강진 다산박물관 앞 비석. 사진=남민

 

다산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丁載遠)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로 해남 윤씨다. 다산의 집안은 대대로 8대 옥당(玉堂, 홍문관) 명문이었지만 노론 치하에 남인 집안이라 고조부 이후 삼세(三世)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다. 정재원이 남인 재상 채제공의 추천으로 말직인 고을 원님에 나갈 정도였다.

다산은 6살에 오언시를 짓기 시작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22살에 성균관 유학 때 정조를 처음 알현했다. 정조는 그가 임오년생임을 듣고 생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던 임오화변을 떠올린 듯하다. 이후 정조는 다산에게 각별한 애정으로 관심권에 뒀다. 정조에게 다산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교목세신(喬木世臣, 여러 세대에 걸친 충성스런 신하)의 표상이었다. 다산이 정조와 ‘쇄신’을 추구하며 개혁을 함께한 18년,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에 이듬해 오랜 유배를 떠나야 했다.

1800년은 다산의 인생에 큰 변곡점이 된 해다. 정조로부터 6월 그믐 입궐하라는 통보를 받고 고향 마재에서 기다리는데 입궐해야 하는 날 아침 왕의 부고를 받았다. 정치 인생 목표였던 ‘정조의 요순 임금 만들기’ 프로젝트가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11살의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함께 노론 벽파의 시대가 열렸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이었으니 정국은 정조 치세 24년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강진 약천
다산이 즐겨 찾았던 강진 약천. 사진=남민

 

다산에게도 곧바로 악몽이 닥쳤다. 18년간 강진으로의 유배를 떠난 것이다.

다산은 오랜 유배 생활로 가난에 몹시 시달렸다. 이때 노론 측의 회유도 있었다. 함께 벼슬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들 학연조차 이젠 반대파에 고개 숙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다산은 영혼을 팔아 부귀를 누릴 순 없었다. 자리 하나 얻기 위해 명예를 저버릴 수 없음을 아들에게 분명히 밝혔다. 더 먼 추자도로 쫓아보내도 눈 하나 꿈쩍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부르는 정약용의 대표 호는 다산(茶山)이다. 하지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다산은 자신의 묘지명에 ‘사암(俟菴)’으로 남겼다. ‘사(俟)’는 ‘기다린다’는 의미다. 누구를 기다릴까? <중용>에서 말하는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온 말로, 자신의 처세가 훗날 공자와 같은 성인을 기다려 심판 받아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표현이다. 불의에 가담하지 않은 자신의 행동, 후세 길이 귀감을 남긴 아름다운 이름이다.


◇ 정약용의 ‘다산초당’… “후세에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강진 사의재
강진 사의재. 사진=남민

 

11월 강진 땅에 도착한 유배객 다산은 동문 밖 주막의 주모와 딸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생활했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그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했다. 생각(思)·용모(貌)·언어(言)·행동(動)을 바르게 하라는 뜻이다. 황상(黃裳)과 이청(李晴) 등이 애제자가 되었다. 다산은 주막의 사의재에서 4년을 살았다. 지금도 초가로 복원해 당시의 분위기를 연출해 놓았다. 뒤쪽엔 사의재 한옥 체험관이 조성돼 있다.

다산은 1805년 백련사 혜장 스님의 소개로 보은산 계곡의 고성사(高聲寺)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이듬해 제자 이청의 집을 거쳐 1808년 외가 해남 윤씨의 산에 다산초당을 짓고 자리를 잡는다. 주변에 야생 차나무가 많아 호를 ‘다산(茶山)’이라 지었다. 그 역시 차를 즐겨 마당의 넙적바위에서 차를 끓여 들었다. 손수 판 샘 약천의 물로 차를 끓이며 차를 연구해 ‘각다고’라는 글도 남겼다. 다산의 차 지식은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에게 전수되어 차문화로 부흥한다. 덕분에 초의선사는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진다.

 

강진 정석(丁石) 각자
암벽에 새겨진 정석(丁石) 각자. 사진=남민

 

초당에서 오솔길을 따라 20~30분 걸으면 그의 각별했던 벗 혜장선사의 백련사가 있다.

둘은 왕래하며 인생을 논하고 주역과 같은 철학을 논했다. 다산은 초당에 책 1000권을 쌓아두고 학문에 몰입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무려 500권의 책을 저술했다. 앉아서 책을 쓰다 보니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과골삼천’이란 고사가 여기서 생겼다.

다산초당은 그의 대표 저서 ‘1표 2서’의 산실이 됐다. 다산초당에서의 10년, 초당에는 그의 흔적이 몇 개 남아있다. 산 암벽에 ‘정석(丁石)’이란 글씨를 새겼다. 자신의 성을 돌에 새긴 것이니 ‘정석’이다. 초당 아래 만덕리엔 다산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더 이상 정계에 나아가지 않았다. 풍파에 희생양이 되어 고된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처세와 학문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자부하면서 그는 깨끗하고 당당하게 살다 떠났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강진의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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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 별서정원

월출산 아래에 ‘호남 3대 민간 정원’으로 꼽히는 백운동 별서정원이 있다. 넓게 펼쳐진 다원 사이에 잘 보존된 원림이다. 다산 정약용도 월출산을 등반한 뒤 하룻밤 유숙했다. 

 

거북이가 강진만으로 들어오는 모양의 가우도(駕牛島)가 있다. 보은산이 소의 머리이고, 소의 멍에에 해당된다 해 이렇게 부른다. 강진만 위 출렁다리와 함께 걸어서 1시간 남짓 섬을 둘러볼 수 있다. 정상에서 짚트랙도 탈 수 있다. 

 

강진 가우도
강진 가우도. 사진=남민

 

고금도와 마주하는 강진 최남단 마량항(馬梁港)은 미항이다. ‘마량’은 말을 건네주는 포구라는 뜻이다. 제주에서 실어 온 말들을 이곳에 내렸다. 전라 병영성은 1417년(태종 17년)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년) 갑오경장까지 500여 년간 제주도와 전라도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 총지휘부다. 총 길이 1060m에 높이 3.5m로 사적 397호다.

 

고려청자박물관은 강진이 고려청자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국내 청자 요지가 400곳 정도 발굴됐는데 강진에 188곳이 있다. 청자의 초창기부터 전성기, 쇠퇴기까지 전 과정을 보여준다. 청자박물관과 함께 청자 판매장도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유명한 시인 김영랑(金永郞)의 생가가 강진 군청 근처에 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했던 저항 시인으로 87편의 시를 남겼다.

 

강진 백련사
강진 백련사 전경. 사진=남민

 

백련사(白蓮社)는 고려 때 ‘백련결사운동’으로 이름을 떨친 것이다. 조선 초 효령대군이 8년 간 머물며 중수를 도왔다. 8 대사를 배출한 명찰이다. 천연 기념물 제151호 동백나무 군락으로도 유명하다. 다산과 혜장선사의 사연이 깃든 사찰이다. 무위사(無爲寺)는 사찰 이름처럼 위안처가 되는 곳이다. 원효대사가 관음사로 창건했다가 조선 명종 때 무위사로 개칭했다. 국보 제13호인 극락보전은 단아함과 소박미가 넘친다. 내부는 총 31점의 벽화로 장식돼 있었는데 지금은 두 점만 남기고 29점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겼다. 

 

글·사진=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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