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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한산도서 울린 승전보, 왕도 버린 조선을 구하다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⑫통영·끝

입력 2021-09-28 07:00 | 신문게재 2021-09-28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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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한산도 한산대첩 현장
통영 한산도 앞 바다 한산대첩 현장. 사진=남민

 

어려운 일엔 앞장, 이익은 나중에 ‘선난후획(先難後獲)’ 

 

樊遲問知(번지문지), 子曰(자왈), 務民之義(무민지의) 敬鬼神而遠之(경귀신이원지) 可謂知矣(가위지의). 問仁 曰(문인 왈), 仁者先難而後獲(인인자선난이후획) 可謂仁矣(가위인의) 

 

번지(樊遲)가 지혜에 관해 여쭈자 공자께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의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인에 대해서는 “어려운 일은 앞장서 하고, 이익을 챙기는 일은 나중으로 돌리는 것이 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 이순신의 ‘선난후획(先難後獲)’

공자는 “솔선수범은 누구나 쉽게 말하지만, 진정한 군자는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실천으로 옮기고, 그런 후에 따르게 한다”라고 가르쳤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에 대해선 ‘교언영색 선의인’이라고 경계하면서 “옛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행동이 뒤따르지 못할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공자가 말한 이러한 사람은 대체로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높은 자리를 탐하려 남을 모함하지도 않는다. 반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뒤로 숨는 사람은 이익이 보이면 꼭 제일 먼저 달려든다. 우리 역사에서 공자의 ‘선난후획’ 가르침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고 실천한 최고의 위인이 충무공 이순신이다.



◇ 백의종군에 목숨 바친 이순신

 

통영 한산도 수루
이순신 장군의 시에 나오는 수루. 바다를 향해 망을 보던 망루다. 사진=남민

 

임진왜란은 조선 개국 후 200년 간 전쟁을 잊고 태평을 누리며 굳어졌던 안일함이 부른 대 참화였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왜군은 14일부터 파죽지세 한양으로 진격했다. 4월 30일 새벽 비가 퍼붓는 창덕궁 인정전 뜰에서 선조와 동궁, 중전은 급히 몽진 길에 오른다. 신하들이 막아섰지만 임금은 나라는 잃어도 자신만은 살겠다는 선택을 했다. 명나라로 망명까지 하려 했다.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떠난 지 사흘 후인 5월 3일에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한양으로 무혈입성한다.

그 무렵 연전연패하던 육군과 달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연전연승으로 왜군의 발을 꽁꽁 묶었다. 일본 병참을 무력화하고 호남 곡창지대를 지키려면 바닷길 사수가 중요했다. 평양성까지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육군은 더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고립됐다. 선조가 머문 의주를 눈앞에 두고도 더 진격할 수 없었던 것은 통영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거둔 ‘한산대첩’이라는 결정적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길 수 있을 때 싸우고,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통영 한산도 한산정
이순신 장군은 한산정에서 바다 너머 왜적선을 향해 활을 쏘는 훈련을 했다. 사진=남민

 

한산도는 경상도 바닷길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 지리적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그곳에 진을 치고 삼도수군통제영을 배치했다.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호남은 국가의 보호막이며,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그래서 진을 한산도로 옮겨 바닷길을 막으려고 한다”고 적었다. 여기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란 어구가 회자됐다. ‘곡창지대 호남이 곧 국가의 보호막’이라는 뜻으로 그곳을 지키기 위해 통제영을 전진배치 했다는 설명이었다.

1592년 7월 8일. 세계 해전사의 기념비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거제도 입구 견내량에 왜적선 7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먼저 배 5~6척을 보내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공격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견내량의 좁은 해로는 자칫 우리 배 끼리 부딪혀 위험할 수 있었다. 그는 적을 유인해 포위하는 학익진(鶴翼陣)으로 왜적을 섬멸했다. 59척을 격파 및 나포하고 8000명 내외의 왜군을 수장시키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은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부임했다. 선조 임금이 배 12척으로 싸울 수 없으니 수군을 포기하고 권율 장군 휘하의 육군으로 싸울 것을 명했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라며 바다를 지키겠다고 했다. 또다시 선조의 어명을 거역해 죽음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 바다를 그냥 왜적에게 내어줄 순 없었다. 이순신은 이때 ‘미신불사(微臣不死)’라는 말과 함께 선조를 설득했다. ‘이 신하가 살아있는 한 왜적이 감히 넘볼 수 없다’는 뜻이다. 다행히 선조도 이순신의 뜻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명량해전 대승의 씨앗이 됐다.

명량해전은 그 5년 전 한산대첩과 달리 수비를 해야 하는 전투였다. 10배 이상 많은 적을 막기 위해 ‘울돌목’의 좁은 해로를 택했다. 이순신은 이때 “한 명의 병사가 좁은 통로를 잘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의 어록을 남겼다.

 


◇ 하늘이 내린 조선의 구원자

 

통영 한산도 제승당
통영 한산도 제승당 전경. 사진=남민

 

이순신(1545~1598)은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서 아버지 덕수 이씨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의 네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살 위 류성룡, 5살 위 원균)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 문신 가문이었기에 청소년기에는 학문을 익혔다. 이것이 명작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쓴 바탕이 됐다. 12살 이후 아산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보성 군수를 지낸 무인 방진(方震)의 딸과 21세에 결혼하면서 장인의 영향을 받아 무예를 익히기 시작했다. 덕분에 문무를 두루 겸비한 명장이 됐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1년 2개월 전 류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가 된다. 종 6품 현감에서 정 3품으로 파격 승진한 것이다. 숱한 반대가 있었지만 이때만 해도 선조는 불차탁용(不次擢用,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함)을 내세우며 반대 목소리를 막았다. 하지만 이후 이순신은 끝없이 견제를 당했다. 정유재란 직후 왜군의 계략임을 알고 선조의 출정 어명을 어겼던 그는 소환돼 격한 고문을 받았다. 검은 머리가 백발로 변할 만큼 잔혹한 고문이었다. 그런 그였지만 말없이 묵묵히 조선을 구원했다.

한산도는 통영여객터미널에서 배로 30분 거리다. 섬에 내리면 바닷가 산책길을 따라 10분 정도 거리에 제승당(制勝堂) 등 장군의 유적지들이 있다. 이순신은 ‘운주당(運籌堂)’이라 불렀는데 훗날 1740년(영조 16)에 통제사 조경(趙儆)이 칠천량해전 때 전소됐던 것을 다시 짓고 제승당이라 친필로 써 올렸다. ‘운주’와 ‘제승’은 ‘군막 안에서 작전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리를 쟁취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바닷가 쪽 건물이 이순신의 시에도 등장한 ‘수루(戍樓)’다. 바다를 향해 망을 보던 망루다. ‘수루’ 현판 글자는 이순신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제승당 뒤쪽 한산정(閑山亭)은 바다 건너편 과녁으로 활을 쏘던 곳이다. 바다 위의 적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했으니 그 현장감과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이외에 조경 통제사가 세웠던 유허비와 1976년에 세운 영당인 충무사가 있다.

 

 

◇ 함께 둘러보면 좋을 통영의 명소

 

통영 세병관
삼도수군통제영이 육지로 옮겨가면서 지어진 객사 ‘세병관’. 사진=남민

 

통영엔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유난히 많다. 세병관(洗兵館)은 이순신 사후 1603년 삼도수군통제영을 한산도에서 육지로 이전하면서 지은 객사 건물이다. 국보다. 경회루, 진남관과 함께 가장 규모가 큰 단일 한옥으로 꼽힌다. 특히 당시의 건물이라는 유일한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충렬사(忠烈祠)는 1606년 선조의 명으로 세운 사액사당이다. 현판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다. 명나라 신종 황제가 선물했다는 ‘명조팔사품’ 유물이 있다. 착량묘(鑿梁廟)는 장군을 존경한 수군과 백성들이 장군 사후 1년 뒤 세운 ‘이순신 장군 최초의 사당’이다. ‘착(鑿)’은 ‘파다’라는 뜻이다. 왜군이 미륵도와 육지 사이 좁은 바닷길을 파고 달아난 데서 유래했다. 그곳을 ‘판데목’이라 부른다. 

통영 통영운하 석양
통영운하에 석양이 비치는 모습. 사진=남민

 

통영은 ‘바다의 땅’으로 불린다. 500개가 넘는 섬을 연결하는 바다 면적이 땅 면적보다 넓기 때문이다. 소매물도, 장사도, 연화도, 욕지도, 사량도, 비진도 등 쪽빛 바다에 떠 있는 그림 같은 섬들이 많다.
통영은 박경리와 유치진, 김춘수, 전혁림, 윤이상 등 내로라하는 문화예술계 대표 인사들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들의 기념관이 통영에 즐비하다. 이외에 미륵산 케이블카와 동피랑 벽화마을도 바람을 일으키며 이제는 통영 꿀빵, 충무 김밥과 함께 통영의 대표 아이콘이 됐다.

글·사진=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지금까지 ‘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깊이 있고 맛깔나는 콘텐츠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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