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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30년 '은행맨' 은퇴 뒤 '교수'로 제2인생 시작

[나이를 잊은 사람들] 노희성 유한대학교 경영과 교수 "제2의 인생, 경험 살려 미래를 결정하라"

입력 2015-12-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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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이 학교에 갈 것이라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교수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노희성 유한대학교 경영과 교수는 몇 안 되는 은행원 출신 교수다. IBK기업은행 기업금융부장, 인사부장, 강남지역본부장 등을 거치며 은행원으로 30여년을 지냈다. ‘은행맨’이었던 그는 은퇴한 이후 한국교통대 경영학과 교수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 은행원, 교수가 되다

그는 2011년 기업은행에서 은퇴한 이후 은퇴자들의 재취업, 창업컨설팅·재테크 상담 등을 제공하는 시니어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자리를 맡았다. 은퇴자로서는 괜찮은 자리였다. 2~3년간 일할 수 있는 데다 보수도 좋고, 계속 은행권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5개월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아무리 편하고 좋은 자리라도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경쟁력이 떨어져요. 경쟁력이 떨어지면 미래를 보장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 20~30년 더 일해야 하는데, 그 일을 2~3년 한 이후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생각했죠. 은행을 충실히 한 경험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학교에서 사람을 뽑는다기에 도전했죠.”

그는 교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로 은행원으로서의 경험을 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데 내가 했던 것과 전혀 동떨어진 것을 생각하면 안 돼요. 쉬울 것이란 생각에 은행원이 치킨집을 열면 생존할 수 없어요. 바닥부터 기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화려하게 개업식만 하고 망하는 것이죠. 그런데 나는 내가 했던 일들과 관련된 것이기에 가능했어요. 인사관리, 경제원론 등 다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이죠.”


◇ “왕년에 은행에서 잘나갔지!”

물론 그동안의 성과도 주효했다. 그는 기업은행 내에서도 은행 성장에 많은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인사부장, 기업금융부장, 상품개발부장 등을 역임하며 인사, 산학협력 분야에서 굵직한 성과를 이뤘으며 청년실업에 대한 큰 역할도 했다.

그 중 가장 먼저 손에 꼽히는 것이 ‘IBK 잡 월드(JOB World)’다. 그는 2008년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국책은행으로서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 결과가 ‘산업현장과 학생들을 만나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기획한 채용박람회였다. 당시 서울 코엑스, 부산 벡스코에서 열렸던 박람회는 엄청난 성황을 이뤘고, 당시 고졸 채용 정책을 펼치던 이명박 정부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채용 실적이 적었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에 그가 만든 것이 온라인 취업포털사이트 ‘IBK 잡 월드’였다. 이 사이트는 인력난·취업난을 겪던 기업, 사람들에게 구인구직 알선창구 역할을 톡톡히 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영업력도 우수했다. 2000년대 중반 기업은행은 곤지암에 지점을 개소하고 상품개발본부장이었던 그를 지점장으로 발령 냈다. 당시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현재와 달리 곤지암은 허허벌판에 소머리국밥집 밖에 없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열악한 영업환경 속에서 생긴 조그만 신생점포를 급성장시켰다. 그는 산골짜기를 누비며 산 깊숙이 자리한 공장이나 기업을 찾아가 영업을 했다. 곳곳에 걸린 현수막도 영업 수단으로 활용했다. ‘곤지암고등학교 동문회 체육대회’, ‘로터리 클럽 모임’ 등 현수막을 보고 찾아가 화환을 전달하고 명함을 주며 영업을 했다.

기업은행에서 최초로 골프장과 거래를 트기도 했다. 그는 돈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곤지암 내 골프장을 찾아갔다. 물론 사례가 없던 일이어서 두려웠지만, 부딪혔다.

그 결과 골프장을 위해 회원들이 모은 150억원을 온라인통장으로 맡았다. 여기에 대기업에서 리조트와 수목원을 만들기 위해 골프장에 지원한 자금 50억원도 유치했다.

이렇게 자금이 확보되자 자신감이 생겼다. 기업들을 찾아가 더욱 적극적으로 영업을 뛰었다. 그 결과 곤지암 지점은 개소 6개월 만에 180개 기업과 거래하게 됐다. 곤지암 지점이 성공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지만, 지점은 성공했다.

현재 곤지암 지점은 규모는 작지만 직원들이 가고 싶어 하는 지점으로 발돋움 했다. 본부나 큰 지점에서만 나오는 본부장이 연이어 3명이 발탁되기도 했다.


◇ 교수평가 2년 연속 만점 비결은?

이 같은 은행원으로서의 생활은 그에게 다른 교수들에게 없는 무기가 됐다. 20만개의 중소기업 네트워크와 후배 은행원들과 교감을 가지면서 기업들과 관계를 쌓는 것은 산학협력 부문에서 장점으로 발휘했다.

은행원의 영업 마인드도 다른 교수들과 차별화된 강점이 됐다. 그는 최근 부천에 있는 세무회계사무소 185개에 산학협력기업 240개 등에 학생 취업 관련 공문을 만들어 일일이 봉투작업을 하고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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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유한대학교 설립자인 고(故) 유일한 박사 동상 앞에서 노희성 유한대학교 경영과 교수가 학생들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사진=노희성 유한대 교수)

 

“대학에 있는 사람 중 이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선생님은 가르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은행원으로 영업을 해봤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은행은 업무 자체가 영업이에요. 예금 권유, 대출 판매는 자고 일어나면 그 생각이죠. 특별한 게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죠.”

이 같은 노력으로 그는 지금까지 중소·중견기업에 많은 학생들을 실습 보냈고 취업시켰다. 유한대에서만 학생 10명이 이미 일자리를 찾았다. 이는 신설학과라는 점과 현재 학생 4분의 1 규모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다. 그 결과 그는 교수 평가에서 2년 연속 100점 만점을 받았다.

 

 

◇ “제2의 인생 지나 제3의 인생으로”

교수는 65세가 정년이다. 그가 현재 59세라는 점을 감안하면 6년이 남은 셈이다. 그는 “6년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은행에서 은퇴할 때처럼 학교에만 몰두해서는 미래를 보장받기가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이란 말이 있어요.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는 말이죠. 현실에만, 현재 위치에만 매달리다간 미래를 보장할 수 없게 되요. 때문에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선에서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장점을 살려 사람들의 진로 고민을 덜어주려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진로지도 전문강사 교육도 받았다.

노희성 교수는 “사람들이 자기가 갈 길을 제대로 못가면서 치루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며 “취업, 진학 등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택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유승열 기자 ysy@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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