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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2080 시론] ‘진정한 기부천사’ 척 피니를 기리며

입력 2023-10-1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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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피니(왼쪽)과 빌 게이츠. 생전 기부 약속을 누구보다 일찍, 그것도 익명 기부를 실천했던 척 피니를 빌 게이츠는 ‘기부 집단의 영적인 자도자’라고 추앙했다.

 

면세점 사업을 하나의 글로벌 사업으로 재 창출해 낸 불세출의 사업가 찰스 프란시스 척 피니(Charles Francis Chuck Feeney) DFS 그룹 창업자. 그는 동시에 세계 최대 개인 재단 가운데 하나인 ‘애틀란틱 박애재단(The Atlantic Philanthropies)’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그가 지난 9일 92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척 피니는 ‘기부의 전설’이었다.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가 “기부 집단의 영적인 지도자”라고 무한 존경심을 보였을 정도다. 그는 자신이 평생 쌓은 80억 달러를 생전에 모두 기부했다. 특히 남들이 티를 내고 하던 기부를 그는 철저히 비밀스럽게 행했던 ‘은둔의 기부자’였다. 이미 전 재산을 기부했는데도 이를 모르고 <포브스>가 그를 ‘미국의 400대 부자’에 수 년 동안 이름을 올렸던 것만 봐도 그의 남다른 기부철학을 알 수 있다.

척 피니의 이런 ‘은둔의 선행’은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다. 독실한 기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신도 단체에서 매주 봉사활동을 펼쳤고, 어머니는 루게릭병을 앓는 이웃을 돌보기 위해 있지도 않은 약속을 일부러 만들곤 했다. 당사자가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선행을 소문내지도 않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이런 인생철학이 척 피니를 자연스럽게 기부 천사로 키웠다.

그는 남다른 돈 버는 재주로 일찍부터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했다. 세계 최초로 호텔경영학과를 만든 코넬대에 지원해 합격한 그는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팔았다. 학비가 무료인 프랑스의 그르노블대학 정치학 석사과정에 입학해서는 무전여행 중 미군 해병들을 대상으로 면세 주류를 팔면서 면세 사업의 가능성에 눈을 떠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다. 호놀롤루 공항 면세점 입찰권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그는 거침없는 도전으로 홍콩과 관, 사이판 등을 개척하며 면세점의 선진화, 글로벌화를 완성한다.

사업이 성공할 수록 그는 기부에 더 애착을 갖게 된다. 회사가 처음 흑자를 기록하자마자 세전 수 5% 기부 원칙을 실천했다. 그의 기부 때문에 동업관계에도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참가한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그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를 경험한다. 마침내 그는 DFS 지분부터 개인사업체와 투자금까지 모든 자기 재산을 재단에 넣겠다고 결심하고 1982년 3월 1일 버뮤다에서 ‘애틀랜틱 재단’을 공식 출범시켰다. 세계 곳곳의 가난과 재난을 퇴치하고 교육 증진과 건강 향상, 어린이와 노인 청소년을 지원하겠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동업자들조차 몰랐다. 모든 기부는 익명으로 처리했다. 수혜자에게 기부자가 누구인지 절대로 알리지 않는 것을 재단의 기부 원칙으로 명확히 했다. 자신의 이름이나 애틀랜틱 재단 이름이 공개되는 순간 곧바로 지원을 끊는다는 무시무시한 조건까지 약속하도록 했다. 세계 최대의 ‘비밀 재단’인 셈이다. 기부의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고국 아일랜드에 현대식 호텔 ‘캐슬트로이 파크 호텔’을 지어 주고도 이곳에 묵게 될 때 그는 늘 일반 객실에서 기거했다.

척 피니의 ‘익명 기부’는 그가 애틀란타 재단의 DFS 지분을 팔면서 끝이 났다. 그 때서야 비로서 그는 언론에 자신이 이미 억만장자가 아니며, 오래 전에 모든 자산을 재단에 기부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자신에게 남은 재산은 200만 달러도 채 되지 않는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후에도 척 피니는 2006년까지 베트남의 건설과 보건 사업 등에 2억 2000만 달러를 제공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생명공학과 나노기술연구소를 지원하는 등 더 열심히 기부 활동을 펼쳤다.

척 피니가 가장 기부를 많이 한 분야는 고등교육과 연구였다. 모교인 코넬 대학에 6억 달러 넘게 익명으로 기부했다. 하지만 그가 지어준 그 많은 코넬대의 건물 가운데 그의 이름이 새겨진 것은 없다. 그는 스탠퍼드의 2건의 연구과제에도 6500만 달러를 익명으로 기부했다. 스탠퍼드 어디에도 그의 이름이 붙은 건물은 볼 수 없다. 쿠바에서 만연하는 만성 신장질환 이야기를 듣고는 의료 교육 협력을 중심으로 1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기금의 대부분을 고등교육에 지원했다.

척 피니의 기부 원칙은 크게 세 가지 였다. 하나는 ‘어떤 경우든 자신의 이름이 노출되지 않는다’ 였고, 다른 하나는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돕는다’였다. 세 번째는 특이하게도 ‘빠르고 효과 있게 나눠준다’였다. 그는 익명으로 기부를 해도 그 돈이 제대로 쓰여 최대한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았는지 늘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기부 철학도 단순했다. “그저 필요한 것보다 부가 넘친다고 느꼈기에 기부에 나섰을 뿐”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남을 돕느라 자연히 자식들에게는 상속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는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일부러 ‘자린고비 아빠’를 자임했다. 방학 때 마다 아르바이트를 시켰고 집 전화요금도 각자 부담케 했다. 부를 과시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는 2만 원도 안되는 값 싼 타이멕스 시계를 차고 중고 볼보를 몰았다. 장거리 비행에도 가족까지 모두 일반석에 태웠다. 말리는 항공사를 “비즈니스석은 속도가 더 빠른가요”라며 유쾌하게 일축했다.

‘부자들의 기부’가 아직은 낯설었던 2009년 초에 당시 94세의 재계 원로 데이비드 록펠러가 미국 최고의 억만장자 12명을 뉴욕으로 비밀리에 초대했다. 당대의 거부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와 함께 척 피니도 초대되었다. 이날 세계 최고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상당한 재산’을 생전에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키로 다짐했다. 하지만 척 피니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지 못했다. 이미 거의 전 재산을 기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진래 기자 jjr8954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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