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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에 취하다] 순정만화 주인공 푸르매 눈빛에 울고 웃던… 그 소녀들을 위하여

[아날로그에 취하다] 1990년대 순정만화

입력 2015-03-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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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순정만화는 학원물에서 SF, 신화와 로맨스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2000년대 웹툰에 밀려 사양길을 걷던 순정만화가 최근 모바일메신저와 포털사이트, 유료만화사이트 등을 통해 재유통되고 있다.

 

 

홍보대행사를 운영하는 이진영(43)씨는 최근 여의도 KBS 인근에서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전권을 구매했다. 총 14권인 ‘아르미안의 네딸들’ 가격은 5만원. 이씨는 “학창시절 순정만화잡지를 통해 즐겨보던 만화책 단행본들을 이렇게 구할 수 있게 돼 기쁘다”며 “만화잡지나 단행본이 출간되면 구매할 마음이 있는데 최근에는 웹툰이 아니면 만화를 접하기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지금은 사회의 주축이 된 3040여성들의 사춘기 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했던 순정만화. 그 많던 순정만화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씨가 산 순정만화는 주로 폐업한 만화방, 책 대여점 등을 통해 흘러나왔다. 중고책 판매업자는 “주로 20대에서 40대 직장인 여성들 사이에서 순정만화를 찾는 수요가 높다. 특히 현재 활동이 뜸한 이미라 작가 작품이 잘 팔린다”며 “이미라 작가는 판매업자들 사이에서도 ‘레어템’으로 꼽힌다”는 귀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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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독자가 만화방에서 강경옥 작가의 '별빛속에'를 읽고 있다. 최근 구매력있는 3040 여성들 중에는 90년대 인기를 끈 순정만화책을 구매해 소유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사진=김동민 기자)

 


한국순정만화의 전성기는 1988년 11월, 만화월간지 ‘르네상스’ 탄생 후부터 IMF 직후인 2000년대 초반까지 꼽힌다. 한국여성만화가협회 이시현 총무는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화이트, 윙크, 댕기 등이 창간했던 199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가 우리나라 순정만화의 최고 전성기”였다며 “80년대 출판만화에서 이어진 순정만화의 계보가 90년대 만화잡지를 통해 꽃을 핀 시기였다”고 분석했다.

1977년 MBC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캔디캔디’를 방영한 후 ‘올훼스의 창’,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 일본순정만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만화책들이 한국 여중고생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만화방’은 담배연기 자욱한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기에 여중고생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만화방에 이어 도서 대여점 문화가 착륙했고 일본순정만화를 통해 어느 정도 시장수요가 파악된 한국순정만화계에 김동화, 황미나, 한승원, 김혜린 등이 뛰어들어 시장을 개척했다. 김동화의 ‘아카시아’, 황미나의 ‘안녕 미스터블랙’, ‘불새의 늪’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초창기 순정만화 속 주인공들이 비정상적으로 긴 팔다리와 작은 얼굴, 다이아몬드가 그려진 큰 눈 등 일본 순정만화의 그림체를 고스란히 모방했다면 이 시기 순정만화는 방대한 서사적 구조와 인물의 깊이있는 심리묘사, 학원물에서 SF를 넘나드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김진의 ‘바람의 나라’,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김혜린의 ‘북해의 별’, ‘비천무’, ‘불의 검’ 등은 신화와 역사를 결합한 블록버스터 만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역사와 판타지, 순정물 고유의 로맨스가 뒤섞인 이 작품들은 작가의 상상력과 만화라는 지면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 소녀들의 가슴을 불태웠다. 강경옥은 ‘별빛속에’, ‘라비헴폴리스’. ‘노말시티’ 등으로 순정만화의 SF화를 구축했고 황미나는 코믹, 아동, 순정 SF, 역사를 넘나들며 순정만화계의 멀티테이너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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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라 작가의 '인어공주를 위하여' 속 주인공 서지원은 한국 순정만화 남자 주인공의 대표상이다. 여주인공 이슬비가 기다리는 어린시절 첫사랑 '푸르매 왕자'가 바로 서지원이었다. 1994년 데뷔한 가수 서지원(작은 사진)은 '인어공주를 위하여' 속 주인공 서지원의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이미라, 이은혜, 원수연은 한 세대 위 선배들과는 차별화된 학원물로 90년대를 주름잡았다. ‘인어공주를 위하여’, ‘점프트리에이플러스’, ‘풀하우스’ 등이 이 시기 태동된 작품들. 그다지 예쁘지 않지만 밝고 명랑한 성품의 여주인공과 모든 조건이 완벽한 남자주인공, 그리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반항적인 성품을 지녔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또 다른 남자주인공 등 지금의 로맨틱코미디 드라마 남녀주인공 구도도 이시기 학원물 등을 통해 구축됐다. 

 

특히 이미라 작가는 대표작 ‘인어공주를 위하여’를 통해 서지원, 푸르매, 이슬비 등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1994년 데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수 서지원이 이미라 작가의 작품 속 주인공인 서지원의 이름을 택한 것은 당시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순정만화, 모바일 메신저 통해 다시 태어나다

만화책 위에 기름종이를 얹고 다이아몬드 눈망울을 따라 그렸던 추억을 안긴 순정만화,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전반적으로 출판시장이 축소되고 순정만화잡지가 잇달아 폐간하면서 출판문화 중심의 순정만화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한국만화연감에 따르면 2002년 835종이 출간된 순정만화 단행본은 2011년 189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울러 2000년대 들어 포털사이트 중심의 웹툰이 자리를 잡았고 대여점 문화가 사라진 것도 방대한 서사의 순정만화가 밀려난 요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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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에 다시 연재되고 있는 한승원의 '프린세스'.

 


하지만 순정만화의 수요는 여전히 유효하다. 원수연의 ‘풀하우스’는 정지훈, 송혜교 주연 드라마로 제작됐고 김진 작가의 ‘바람의 나라’는 온라인 게임으로 재탄생했다. 최근에는 옛 순정만화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3040 여성들을 중심으로 스마트폰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유료구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시현 총무는 “카카오 스토리의 다양한 유료결제 콘텐츠 중 순정만화가 상위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며 “90년대 10대였던 순정만화 팬들이 구매력을 갖춘 30~40대가 되면서 순정만화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1995년 처음 연재를 시작했다 휴재한 한승원 작가의 ‘프린세스’가 포털사이트 네이버를 통해 재연재된 사례나 신일숙 등 영향력 있는 작가들이 레진코믹스 같은 유료사이트를 통해 활발히 활동하는 것도 고무적이다. 이 총무는 “2000년대 잡지에서 웹툰으로 넘어오면서 생활툰이나 개그툰이 인기를 누렸는데 다시 서사 중심의 장편만화들이 인기를 끄는 시점이 온 것 같다”고 분석했다.

  

브릿지경제 = 조은별 기자 mulga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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