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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100] 길에서 죽은 딸, 엄마는 여전히 길 위에서 '살아간다'

[Culture Board] 성대 김귀정 열사의 엄마이자 한 여성의 삶 다룬 영화 '왕십리 김종분'

입력 2021-11-10 18:45 | 신문게재 2021-11-1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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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스토리
동문들과 텀블벅 후원을 통해 제작비가 8000만 원이나 모금된 이례적인 현장이었던 ‘왕십리 김종분’의 한 장면. (사진제공=㈜인디스토리)

 

엄마는 길에서 가래떡을 팔아 소를 살 만큼 수완이 좋았다. 17살부터 공장에 취직해 결혼하고 세 아이를 낳았다. 남편이 앓아눕자 친정어머니를 떠올리며 자신도 길거리에 좌판을 열어 장사에 뛰어들었다. 여든을 훌쩍 넘은 주인공은 50년 전 워킹맘의 시초나 다름없다.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호등 옆 작은 노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수십 년을 거래해온 작은 시장에서 마늘을 사다 까서 팔고 채소를 사와 다듬어 내놓는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뻥튀기와 찐 옥수수, 가래떡 구이는 간판 하나 없는 작은 노점상의 대표메뉴다. 손님이 가격을 물어보기도 전에 일단 넣고 보는 수완은 결코 밉지 않다. 관심을 갖고 물어보는 순간 벗어날 수 없는 이 상술은 지갑이 열릴 수밖에 없는 푸근함으로 인해 무장해제된다. 

㈜인디스토리1
영화는 독립영화관을 비롯해 전국의 복합상영관에서 공개된다.(사진제공=㈜인디스토리)

‘왕십리 김종분’은 이제는 대형 쇼핑센터와 브랜드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찬 행당동과 왕십리를 품은 성동구의 어제와 오늘을 훑는다. 동네로 진입하는 길의 경사가 청룡열차 수준인 산동네였던 이곳은 1990년대 초만 해도 매캐한 최루탄 가스가 하루도 터지지 않는 날이 없던 곳이기도 하다. 


영화는 30년 전 민주화 투쟁을 하다 경찰의 토끼몰이로 숨진 성균관대 불문학과 4학년이었던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인 김종분 여사의 삶을 통해 시대가 가진 아픔을 관통한다.

 

그때 딸의 친구이자 선후배였던 동문들은 여전히 ‘엄마 김종분’을 찾아가 뜨거운 밥을 먹는다. 억울하게 길에서 죽은 꽃 같은 딸과 나이가 비슷했던 이들은 모두 50대 중년이 됐다. 영화는 길에서 밥벌이를 하고 길에서 딸을 잃고도 여전히 길에서 또 다른 자식들을 품에 안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도시의 변화를 아우른다.


여든을 넘은 큰 누나를 걱정하는 동생과 이제는 과수원을 하며 언니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여동생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엄마이자 할머니로 불린 누군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들 역시 반짝이는 꿈과 젊음을 지닌 여성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 영화의 원제는 ‘가장 김종분’이었다. 사별한 남편을 대신해 가장이 됐고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등짐까지 지어 날랐던 장한 엄마고 강한 여자였다. 어느 날 치마를 입고 나가다 돌아와 청바지로 갈아입고 나갔던 딸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더니 영안실로 안내됐다. 

연출을 맡은 김진열 감독은 “자녀를 잃고 슬픔에 빠지는 어머니가 아닌, 현재에도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여성으로 그려지길 바랐다”고 말했다. 이제는 세월의 흐름을 얼굴에 켜켜이 얹고 굽은 등으로 오늘도 왕십리역 11번 출구 앞을 지키고 있다. 맛있게 삶아진 옥수수를 식혀놓는 소쿠리는 낡은 선풍기망이다. 그 근면하고 정겨운 모습에 눈물이 왈칵 차오른다. 102분.
 
이희승 기자 press512@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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