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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 칼럼] 법이라는 용어의 왜곡과 혼동에 대하여

입력 2018-06-2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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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철
권혁철 한독경제연구소 소장

사람들은 통상 “법대로 하자”고 한다. 또 한국을 법이 다스리는 ‘법치국가’라고도 한다. 의회에서 통과시킨 법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지므로 법치국가라는 것이다. 또 의회에서 법을 만들므로 의회를 입법부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회에서 만들어지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법(Law, Recht)이 아니다. 따라서 법이 아닌 것을 만드는 의회를 입법부(Lawmaker)라고 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닌 것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지는 국가를 법치국가(Rule of Law, Rechtsstaat)라고 할 수도 없다. 의회에서 만들어지는 것의 대부분이 법이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 전통에 따르면 법다운 속성을 지닌 것만이 법이다. 예를 들어 하이에크(국내에서 대표적으로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는 법다운 법이 되기 위한 조건을 몇 가지 언급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법의 일반성 조건과 법의 추상성 혹은 탈목적성 조건이다. 법은 사적 개인은 물론 국가까지 포함한 누구에게라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차별금지)는 것이 법의 일반성 조건이다.

또한 법은 사람들의 특수한 이해관계나 이상(理想) 등에 관해 중립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목적과도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법의 추상성 혹은 탈목적성 조건이다. 이런 조건들에 부합되는 것들만이 법이며, 이 법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지는 국가를 법치국가라고 한다. 이런 조건들에 비추어본다면, 한국의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들 중 과연 몇이나 법다운 법이 될까? 또 한국을 법치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영어나 독일어에서는 용어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는 있지만. 미국 의회에서 통과되는 것들을 Law라고 부르지 않고 Act라고 부른다. 독일 의회에서 통과된 것들도 마찬가지로 Recht라 하지 않고 Gesetz라고 한다. 독일 의회를 다른 말로 Gesetzgebungsorgan, 국회의원을 Gesetzgeber라고 표현한다. Recht가 아닌 Gesetz를 만드는 기관, Gesetz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Law(Recht)도 법이라고 부르고, Act(Gesetz)도 법이라고 부른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Rule of Law’가 아닌 ‘Rule of Act’에 따라 통치하는 것도 법치국가라고 한다. 영어에서는 ‘Rule of Act’ 대신에 ‘Rule by Law’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것 역시 정확한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렇게 법이라는 용어의 왜곡과 혼동이 극심하다.

하이에크는 이와 관련해 자신의 저서 ‘Law, Legislation and Liberty’에서 Law와 Legislation으로 분명하게 구분했다. 여기서 Legislation은 Act를 뜻한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서 제목은 ‘법, 입법, 그리고 자유’이다. 명확한 구분이 되는가? 번역서 안의 내용까지 파악하기 전에는 ‘법’과 ‘입법’이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쉽게 알 수가 없다.

토론회나 세미나 등에서 ‘법치’ ‘법치국가’를 이야기할 때도 논자마다 그 의미가 모두 다르다. 누구는 ‘법치국가’라는 용어를 ‘Rule of Law’라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반면, 또 다른 논자는 동일한 ‘법치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인 ‘Rule of Act’라는 의미에서의 법치국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토론과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용어의 왜곡과 혼동에 따른 결과이다.

용어의 왜곡과 혼동은 인식의 왜곡과 혼동을 초래한다. 용어의 왜곡과 혼동을 배제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하나의 방법은 현재의 ‘법’이라는 용어를 ‘Law, Recht’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고, ‘Act, Gesetz’에 해당하는 용어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자(漢字)에 조예가 깊은 분의 참여가 필요할 듯하다. 새로운 용어에 따라 현재의 입법부도 당연히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용어가 정리되면 사법부와 변호사의 역할도 확실하게 될 수 있다. 사법부가 ‘정의의 최후 보루’라는 표현은 Act가 아닌 Law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정의의 규칙을 법 규칙에 적용한 것이 곧 Law이며, 이 Law를 수호하는 것이 사법부의 역할이라는 뜻이다. 또한 변호사를 Lawyer 혹은 Rechtsanwalt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들이 Act가 아닌 Law 혹은 Recht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권혁철 한독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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