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위치 : > 뉴스 > 오피니언 > 전문가 기고

[유영만의 교육시선(視線)] 몸이 실종된 교육, 맘이 아픈 교육

입력 2018-08-02 08:08 | 신문게재 2018-08-02 19면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 밴드
  • 프린트
2018070201000055900002231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지덕체(智德體)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교육이라야 올바른 교육이다. 하지만 현실은 지(知)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만 지혜는 창조되지 않고, 덕(德)은 없어졌고 공감능력을 실종되었으며, 몸(體)은 망가져서 건강한 신체기반은 무너진 지 오래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며 깨닫는 체험적 교훈보다 머리를 쓰는 지능을 통해 지식을 쌓아나가는 창백한 책상 교육이 주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체험을 통해 현실의 무게를 깨닫는 교육이 없다 보니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공감하는 능력은 거의 없어졌다.

체험하지 않고도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체험하지 않고는 가슴으로 느낄 수 없다.

몸(體)이 먼저 움직여 공감(仁)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지혜(智)가 축적되는 ‘체인지(體仁智)’ 교육이 전개될 때 지덕체(智德體)는 물론 진선미(眞善美)를 고루 갖춘 전인(全人)이 탄생될 수 있다. 교육 분야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자리잡은 인식 중의 하나는 몸보다 머리, 감성보다 이성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러다보니 체력보다 지력을 강조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공감하는 능력보다 차가운 머리로 판단하는 지성을 강조하는 교육으로 일관해왔다.

철학자 니체는 일찍이 신체가 커다란 이성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은 작은 이성이라고 하면서 커다란 이성 신체가 작은 이성 머리를 지배한다고 했다. 철학적으로 신체가 보여주는 감정과 욕망은 변덕이 심해서 냉철한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건강한 신체의 담보 없이 냉정한 이성적 판단력도 생기지 않고, 타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공감력도 발휘되지 않는다.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이며, 뇌력도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생기지 않는다. 아인슈타인도 “지식은 책상에서 앉아서 머리로 배울 수 있지만 진짜 소중한 지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생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이 머리를 통해서 축적한 방대한 지식을 순식간에 대체하는 시대, 교육은 로봇과 인공지능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지성과 지혜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배워야만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하면서 배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진짜 소중한 깨달음의 지혜는 책상에 앉아서 나오는 생각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런 저런 시도 끝에 생기는 행동과 실천의 산물이다.

손발을 움직여 실천하지 않고 머리로 생각만 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복잡한 생각보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진지한 실천을 반복하는 일만이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세상은 머리로 생각만 하는 사람보다 몸을 움직여 단순한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하는 사람이 바꿔나간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움직인다는 사자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이 가르쳐주는 지혜다.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실천하기 어려운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생각하며, 결과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생각만 거듭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책상에 앉아서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리저리’ 행동으로 옮기면서 시행착오 끝에 깨달음과 교훈을 얻는 사람이다. 영어의 알파벳은 a로 시작한다. 왜 a로 시작하는가. a는 action, 즉 실천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 퍼가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 인스타그램
  • 프린트

기획시리즈

  • 많이본뉴스
  • 최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