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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 이발사의 디제잉… 턴테이블 위 단골의 추억이 돌아간다

[아날로그에 취하다] 서울 강동구 성내동 '추억이 흐르는 이발소'

입력 2015-02-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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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미자로 할까?”

가게에 들어선 손님은 간단하게 선곡을 마친 다음 늘 앉던 익숙한 의자에 몸을 기댄다. 주인은 머리 위에 놓인 ‘동백 아가씨’ 엘피(LP)판을 꺼내 오래된 축음기 위에 올린다. 축음기 옆 태엽이 감기고 이내 원판이 ‘틱, 틱’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주인이 바늘을 내리자 가수 이미자의 구슬픈 노래가 엘피판을 타고 가게 안으로 울려 퍼진다.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 있는 ‘추억이 흐르는 이발소’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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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흐르는 이발소’의 주인공 김영오(69)씨가 손님이 즐겨찾는 이미자의 엘피(LP)판을 보여주고 있다.

 

1910년 미국 뉴저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축음기는 이곳을 운영하는 김영오(69)씨가 지난 2006년 일본에서 직접 가지고 온 것이다. 오래된 축음기 곁에는 나훈아, 배호, 이미자, 조용필, 오기택 등 흘러간 가수들의 엘피판이 놓여 있다.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듣고 싶은 음악을 골라요. 이발하고 면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40분, 딱 엘피판 하나 돌아가는 시간이죠. 이발소를 찾는 손님 대부분은 50대 이상이에요. 그들이 머리를 깎던 이발소는 점점 사라지고 이런 음악을 듣는 기회도 적잖아요. 여긴 말 그대로 추억이 흐르는 이발소예요.”

김영오씨가 처음 이발 기술을 배운 것은 열여덟 살이 되던 1964년이다. 월남전이 끝나던 1975년 서울 강동구 명일동에 개인 이발소를 차렸다. 1992년에는 단골이었던 워커힐 호텔 지배인의 간곡한 권유로 호텔 이발사로 취직도 했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 이발 사업을 하던 손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손님은 김씨의 이발 기술을 높이 평가해 함께 일본으로 가길 청했다.  

 

“당시 저를 스카우트한 사람은 도쿄에서 이발 체인점을 하는 회장이었어요. 일본어 때문에 조금 망설였지만 이발 기술에는 자신이 있었고 좀 더 넓은 곳에서 배워보고 싶어 가기로 결심했죠. 다행히 일과 관련된 일본어는 금방 배우게 되더라고요. 축음기는 그때 샀어요.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골동품에도 관심이 있었거든요. 우리나라 청계천 같은 곳에서 22만엔(약 176만원. 2000년 초반 환율 기준)을 주고 샀어요. 당시 월급이 65만엔이었으니까… 월급의 삼 분의 일을 주고 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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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미국 뉴저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축음기로 오른쪽에 있는 태엽으로 작동한다. 돌아가는판 위에 바늘을 놓으면 엘피(LP)판에 있는 홈을 타고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가 2006년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왔을 때 가져온 것은 축음기만이 아니다.

 

당시 일본에서 즐겨 듣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 엘피판은 그가 아끼는 애장품 중 하나다.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이미자였던 시절 일본에는 미소라 히바리가 있었다. 

 

그의 구슬프면서도 맑은 목소리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일본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평생 자신의 출생을 숨기고 살다 사망 직전에야 한국인임을 밝혀 화제가 된 일본 가수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흘러간 많은 가수의 엘피판이 이발소 한쪽 벽면에서 축음기 위에 올려질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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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흐르는 이발소’ 전경.

 

이발소를 찾는 손님 중에는 유독 단골이 많다. 사는 곳이 멀어도 상관없다. 자신의 마음에 꼭 들게 머리를 손질해주는 김씨의 손맛을 잊지 못해 하루에도 15~20명이 이곳을 찾는다. 

 

서울 종로 소재 고등학교의 교감인 이갑용(60)씨는 2년째 이곳에서 머리를 깎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잘 이해 못하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머리 깎는 것에 더 까다로워요. 결과가 마음에 들어야 다음에 가고, 또 가고…그렇게 되면 이제 다른 데는 못 가는 거죠. 여기 사장님이 바로 그래요. 제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해주거든요. 좋은 음악 들으면서 머리도 깎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어디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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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흐르는 이발소’에 음악이 흐르자 손님은 눈을 감고 주인은 노련하게 머리를 깎는다. 2년째 이곳을 찾는 이갑용(60)씨의 세련된 머리 스타일은 김영오(69)씨의 작품이다.

 

현재 강동구청에 등록된 이발소는 180여개다. 반면 미장원 및 헤어샵은 800개가 넘는다. 

 

이발소의 감소 추세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헤어 디자이너를 꿈꾸는 청년은 있어도 이발사를 희망하는 사람은 없다.

“제가 아는 이발소만 해도 1년에 2~3개씩은 사라져요. 이발소를 운영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본인이 아파서 죽으면 그냥 문을 닫는 거예요. 여기만 해도 서울 여기저기에서 나이든 손님이 많이 찾아와요. 머리에 대해선 딱 한마디만 해요. ‘지난번과 똑같이 해달라’고. 그럼 저는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가 정확하게 해줘요. 그게 바로 저의 노하우죠. 나이든 사람은 느는데 이발소는 줄어들고 있으니…안타까워요. 미장원이 있고 헤어샵도 있지만 그들이 이발소의 오래되고 따뜻한 정서를 대신할 수는 없을 거예요.”

글·사진=김동민 기자 7000-ja@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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