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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r Paly 인터뷰] 비워내기와 여운 그리고 진심,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오세혁 연출·이진욱 음악감독

[Pair Paly 인터뷰]

입력 2017-02-0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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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이진욱 음악감독(왼쪽)과 오세혁 연출.(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익숙해지면 안됩니다.”

오세혁 연출이 재연되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2월 4~3월 12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습실에서 배우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이랬다.

“초연하면서 익숙해진 감정들을 익숙하지 않게, 낯설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배우들은 다음 장면에 슬플 줄 알고 어디서 웃음이 나오는지 다 알고 있잖아요.”

‘교향곡 1번’(Symphony no.1) 혹평 후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러시아의 천재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박유덕·안재영)가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김경수·정동화) 박사를 만나 ‘피아노 협주곡 2번’(Piano Concerto no.2)을 작곡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라흐마니노프가 달 박사에게 헌정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바탕으로 넘버를 꾸린 ‘라흐마니노프’는 2016년 초연 당시 객석점유율 96%를 기록하며 사랑받았다. 사랑받은 만큼 기대치가 한껏 올라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시즌 개막을 앞두고 만난 오세혁 연출과 이진욱 음악감독은 익숙해지는 데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소포모어 징크스? 비워내기와 포즈 그리고 덜 익숙해지기
 

라흐마니노프 오세혁 연출, 이진욱 음악감독 인터뷰12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오세혁 연출.(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고민을 되게 많이 했어요. 어쩌면 많은 이들이 워하는 건 새로움이 아니라 그때 느꼈던 것들이지 않을까 싶거든요. 하지만 그 느낌들이 익숙해지면 또 힘들어지죠. 그러다 보니 익숙해진 걸 자꾸 새로운 걸로 메꾸려고 해요. 하지만 새로운 걸 보여주려는 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배우들한테 익숙해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

이에 연습실에는 오세혁 연출의 “익숙해지면 안됩니다”라는 말이 울려 퍼지곤 했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특히 좋았던 기억은 꽤 끈질기게 따라붙곤 한다.

“사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익숙해지지 말라고 말을 많이 할 뿐이죠. 다행히 배우들이 점점 덜 익숙해지고 있어요.”

초연으로 ‘뮤지컬이 이렇게 담담해도 되나’ 하는 의심이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재연은 그 보다 깊이 파고드는 과정이다.

“그 깊이를 표현하지 않고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원하는 건 ‘비가’라는 넘버를 부를 때 같은 정서예요. 저는 ‘비가’를 ‘곡’(哭)이라고 표현해요. 엄마나 할머니들이 다 빠져나간 상태에서 담담하게 하는 곡이 제일 슬프거든요. 그래서 ‘비가’도 담담하게 부르게 하는 데 노력을 많이 했어요. 아무리 슬퍼도 표정은 담담하게…쉽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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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재연의 연출 포인트를 설명한 오세혁 연출은 “그거 하나만 이뤄져도 저 스스로는 만족할 것 같다”며 그 어려운 정도를 표현했다. 이진욱 감독은 차이코프스키의 ‘뱃노래’를 변주한 ‘어린시절’의 합주장면에 대해 설명했다.

“어렸을 때 저희 옆집에 피아노를 치는 여자애가 살았어요. 옆집 애가 바이엘을 치면 저도 따라 쳐요. 기분이 나쁜지 다른 걸 치면 전 또 따라 쳐요. ‘내가 더 잘 쳐’ 하고 싶어서 계속 그랬던 기억이 있거든요. 초연에는 구현을 안했는데 이번에 그런 장면이 있어요. 초연에서는 이유도 없이 합주를 했는데 이번엔 주고받는 대사처럼 보이게끔 바꿨죠.”

이진욱 감독의 설명에 오세혁 연출이 “연주와 연주 사이에 포즈(Pause, 잠시 멈춤)들이 많을 것”이라며 “그 포즈가 언어처럼 들릴 수 있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속된 말로 ‘마 뜬다’고 하는데…음악이 흐르는 동안 아무 말도, 어떤 표현을 안해도 생각이 흐르고 감정들이 오가는 걸 하고 싶었어요. 그런 상태에서도 관객들이 잘 읽어내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라흐마니노프’는.

 

이에 재연 ‘라흐마니노프’에는 그런 포즈가 늘었다. 

 

좀 더 여운을 느낄 수 있게…. 더 깊어지는 건 그런 포즈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라흐마니노프’는 계속 비웠으면 좋겠어요. 3, 4연을 거듭하면서 비울대로 비우는, 그런 작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3연을 하게 되면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의 관계에 대해 시도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해요.”



◇4중주에서 6중주로,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부터 그리고 달라질 커튼콜! 


이진욱
연습실에서 피아노 지도 중인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초연에서 (이진욱) 감독님이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시간문제로 끝까지 하지 못한 걸 채우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음악적으로 좀더 기대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오세혁 연출의 귀띔처럼 재연에서 더 큰 변화를 맞은 것은 음악이다. 가장 큰 변화는 악기 편성이다. 현악 4중주는 더블베이스까지 합류해 6중주로 늘었다. 더블베이스로 오세혁 연출의 표현처럼 “초연엔 청량감이 있었다면 재연엔 무게감이 생겼다.”

“초연에선 실시간으로 음악을 만들면서 진행하다보니 음악이 끊기는 부분이 많아서 아쉬웠는데 이번엔 배우들, 연출님이랑 감정을 더 깊게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가장 눈에 띄는 넘버가 마지막 곡 ‘안녕, 라흐’다. 그 어렵다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1악장부터 연주된다는 귀띔이다.

“지난 시즌에는 엄두가 안나서 못했는데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처음부터 하고 싶었어요. 맨 마지막 장면에 중요한 1, 2, 3악장 에피소드를 넣어서 더 완성된 형태로 재현했죠. 우울증을 치료하고 연주회장에 선 라흐마니노프를 리얼하게 보여주고 싶어서 가장 어려운 처음부터 연주를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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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오세혁 연출.(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수염이 덥부룩해진 피아니스트들 뿐 아니라 현악연주자들도 눈과 손이 풀릴 정도로 연습 중이라는 이진욱 감독의 전언에 오세혁 연출이 “멋모르는 제가 봐도 힘들어 보인다”고 말을 보탠다.


“라흐마니노프의 하이라이트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100년 전 우울증을 극복한 후 달 박사가 돌아가고 가진 연주회 날, 진짜 그 순간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이진욱 감독의 시도에 박수를 쳤다는 오세혁 연출은 이 넘버에 대해 “환희가 느껴지는 노크소리 같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커튼콜 ‘옐레나’ 리프라즈(앞의 노래를 변주한 곡)도 보다 완결된 형태로 바뀔 거예요. ‘옐레나’ 리프라즈 후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가 다시 만나는 장면도 바뀌고 음악적으로 추가될 거예요. 연출님과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의 첫 번째 나오는 잔잔한 테마가 봄의 따뜻한 시냇물 같은 느낌이라는 데 뜻을 맞췄어요. 그런 부분들로 달 박사와 라흐마니노프가 만나면 어떨까 싶었죠.”

이는 라흐마니노프의 아름다운 선율에 실린 드라마와 담백함을 유지하기 위한 오세혁 연출의 비워내기, 포즈 만들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라흐마니노프 멜로디는 너무 아름다워서 아무 것도 하기 싫게 하는 힘이 있어요. 배우들이 멋모르고 느낄 수 있도록, 이 음악과 멜로디에는 울고 화내는 감정들을 들여오고 싶지 않았어요. 싸우다가도 그런 음악이 흐르면 가만히 앉아서 듣는 순간 화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 것도 안하는데 화해를 하는 게 의아할 수도 있지만 일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싸우고 나서 별말 안해도 커피 한잔 마시거나 밥만 같이 먹어도 화해가 되기도 하죠. 이 작품은 그런 화해가 가능할 거라고 믿었어요. 라흐마니노프 음악이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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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부터 함께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이범재.(사진제공=HJ컬쳐)

긴가민가하던 오세혁 연출의 믿음은 초연 당시 관객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면서 확신이 됐다.


“모든 관객들이 다 좋아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겠다 싶어 자신 있게 시작했죠.”


◇재연의 히든카드, 두명의 라흐마니노프 이범재와 박지훈

“저희에겐 두명의 라흐마니노프가 있어요.”

그 어렵게 느껴지는 클래식 음악을 본격적으로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라흐마니노프’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경쟁력은 피아니스트다.

 

라흐마니노프 음악들로 꾸린 넘버들은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 난제기도 했다. 초연에 참여했던 이범재 피아니스트는 ‘쓰릴미’ 10주년 공연에 발탁되는 등 오세혁 연출의 전언처럼 “공연 피아니스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운 좋게도 초연에서 이범재라는 피아니스트를 만난 오세혁 연출과 이진욱 감독은 재연에서 신예 박지훈 피아니스트를 발굴해 영입했다.
 

박지훈피아니스트
재연에 새로 합류한 피아니스트 박지훈.(사진제공=HJ컬쳐)

“1992년생이라는데 손가락이 새 것 같은 느낌이랄까…풋풋해요. (이)범재는 되게 무게감 있는 절정기 시절의 라흐마니노프 같아요. 험상궂고 무게감 있는 독수리같죠. 반면 (박)지훈이는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시절의 소년 라흐마니노프, 종달새 같아요. 연주를 듣고 있으면 아련해지고 맑아지죠.”  

 

“마치 30대와 20대의 라흐마니노프를 보는 것 같다”는 오세혁 연출의 말에 이진욱 감독은 “지훈이를 보고 있으면 아빠 같은 마음이 들면서 맑아진다”고 거든다.

“경희대학교 졸업연주회에서 본인이 직접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반했어요. 두 피아니스트가 소리도 완전 달라요. 비장의 무기죠.”

자신감을 표하는 이진욱 감독에 오세혁 연출은 또 다른 고민(?)이라며 야심찬 포부를 털어놓는다.

“공연을 거듭하면서 범재도 하고 지훈이도 하고 진짜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하면 어떨까 싶어서 고민 중이에요.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 피아니스트가 오래 전 선배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연주하면 의미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럴만한 사람을 찾고 있죠.”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전문가? “깊어져서 좋아요!” 

 

01 (박유덕, 정동화)
지난해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공연장면. 니콜라이 달 박사 역의 정동화(왼쪽)와 라흐마니노프 박유덕.(사진제공=HJ컬쳐)

  

“M씨어터 전문가시잖아요.”

 

오세혁 연출은 지난해부터 ‘헨리4세-왕자와 폴스타프’ ‘템페스트’를 비롯해 최근작 ‘십이야’까지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했다. 이를 빗댄 이진욱 감독의 우스갯소리에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가 손을 잡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장면을 염두에 둔 오세혁 연출은 “무대가 깊어져서 좋다”고 전문가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다들 깊어져서 걱정하는데 전 좋았어요.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좀 더 걸어갔으면 했거든요. 짧아서 몇번 뛰자마자 돌아와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무대가 좀 깊어져서 그 후로 연주도 좀 길게 흐를 것 같아요.”

암전 후까지도 연주가 이어질 것이라고 귀띔한 오세혁 연출은 고전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여운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가 고전영화를 되게 좋아해요. 특히 채플린 영화의 마지막에 보면 꼭 길이 나와요. 여운이 길게 남으면서 마무리한다기 보다는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죠.”

끝에서 만나는 또 다른 시작이 주는 여운과 연속성은 극의 감성을 보다 깊게 그리고 오래도록 감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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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오세혁 연출.(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라흐마니노프가 방에만 있던 사람이니까 마지막에는 꼭 걸어가기를 바랐어요. 달 박사가 옆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밖으로 나와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면서 설 수 있게 되고 걷게 되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오세혁 연출의 바람에 이진욱 감독은 “그 감정을 배우들이 그 누구보다 먼저 느끼길 바랐다”고 털어놓았다.

“(라흐마니노프 역의) 안재영 배우가 연습실에서 ‘피아노 협주곡 2번’ 테마를 치고 있길래 ‘네가 더 열심히 연습해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너의 진짜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걸 또 하겠다고 진짜 열심히 연습을 하는데 본인도 계속 울컥 울컥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이 너무 예쁘고…우리가 먼저 느끼면 많지는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진욱 감독의 말은 “스스로를 안속이고 그순간이 진짜면 다 아는 것 같다”는 오세혁 연출의 익숙해지지 않기와 맞닿아 있다.

“익숙함으로 속이고 싶지 않아요. 아이러니하게 저희 공연장 바로 길 건너편에 천막극장 블랙텐트가 있잖아요. ‘라흐마니노프’가 공연되는 동안 관객들이 그 앞을 지나쳐 오거나 보게 될 거예요.”

블랙텐트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저항하기 위해 연극인들이 광화문 광장에 세운 극장으로 오세혁 연출이 세월호 피해자 유가족들과 함께 한 ‘그와 그녀의 옷장’이 공연되기도 했다.

“우리 공연을 보러 극장으로 들어오는 관객들의 마음이 힘들고 무거울 수 있어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자주 얘기해요. 우리가 저 천막에서 공연을 할 수는 없지만 관객들의 그 마음을 덜어줄 수 있게 노력하자고. 저 광장을 거쳐 ‘라흐마니노프’를 보러 온 게 뿌듯할 수 있도록 속이지 말자고요. 속이지 않는 건 익숙해지지 않고 깊이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울보? 오세혁 연출,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가 애틋한 이진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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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지난 시즌에서 누가 맨 뒤에 앉아서 눈물, 콧물을 계속 흘리고 있길래 누군가 봤더니 연출님이셨어요.”

이진욱 감독의 폭로(?)에 오세혁 연출은 그 눈물의 이유에 대해 슬프거나 뭉클한 장면 자체와 배우들의 노고라고 밝혔다. 두 번째 연출작인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하 나나흰) 연습실에서 눈물을 쏟는 오세혁 연출 목격담도 무궁무진하다.

“장면도 슬프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저 배우가 저 힘든 감정을 매일매일 표현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예요. ‘나나흰’ 막공(마지막 공연) 때도 자야(최연우)가 첫 넘버 ‘반가운 것’를 부를 때부터 눈물이 났어요. 이제 얼마 안있으면 저 배우가 저 감정을 안느껴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이었어요. 매일 이별하고 상처받고…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배우들은 또 가짜로 못하니까. ‘라흐마니노프’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극단(그는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 상임작가다)에서 배우를 잠깐 했었는데 계속 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죠.”

이진욱 감독은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의 관계에 주목했다. 이렇게 짠할 수가 있나 싶은 두 사람에 애틋함까지 느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처음엔 별 얘기가 다 나왔었어요. 드럼베이스 힙합으로 만들어보자고도 했으니까요. 고민 끝에 제가 ‘피아노 협주곡 2번’만 가지고 만들자고 했을 때 아무도 동의한 사람이 없었어요. 연출님 말고는. 그 협주곡이 짠한 게 달 박사가 비올라를 열심히 연습해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그 곡을 연주했어요. 아무도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달 박사였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애틋했어요. 그걸 전하고 싶었거든요.”

드럼베이스 힙합 뮤지컬이 될 뻔했던 ‘라흐마니노프’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이진욱 감독의 의견과 그를 믿어준 오세혁 연출의 의기투합으로 정통 클래식 넘버로 꾸려져 관객을 만났다.


◇라흐마니노프 음악만큼이나 아름다운 연습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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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이진욱 음악감독(왼쪽)과 오세혁 연출.(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이진욱 감독님이 거의 상주하셔서 배우들과 얘기하면서 같이 만들었어요. 저는 실시간으로 음악공부를 하면서 했죠. 초연은 공연도 아름다웠지만 연습현장도 정말 아름다웠어요. 한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타협을 했다기 보다는 다 맞는 얘기들을 하고 있고 맞게 가고 있으니까 너무 기분이 좋았죠.”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는 누군가의 진두지휘가 아닌 오세혁 연출, 이진욱 음악감독, 배우들이 함께 얘기하고 조율하면서 완성한 모두의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처음이었어요. 곡을 쓰고 있는데 배우들이 나 이거 할 거야, 하고 싶어, 할 수 있어…그런 얘기를 수없이 했어요. 배우들의 그 얘기를 허투루 지나갈 수 없는 게 자기가 멋있어 보이려고 하는 제안이 아니라 극이 잘 되게끔, 시너지를 내는 제안이 대부분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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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이진욱 감독의 말에 오세혁 연출은 “직관과 순발력이 좋은 감독”이라고 털어놓는다.


“여기서는 곡이 안나올 것 같아, 이랬으면 좋겠어…이러시는 게 아니라 일단 배우들이 이랬으면 좋겠다고 하면 바로 반영해요. 그리곤 안되면 바로 철수하고…배우들이 곡에 대해서 의견을 얘기하면 바로 오케이를 하세요. 예를 들어 2절까지 부르면 좋겠어 했다가도 배우들이 노래를 해보고 1절까지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하면 단번에 오케이를 해요.”  

 

오세혁 연출의 말에 이진욱 감독이 “줏대가 없고 게으르다”며 쑥스러움을 표하자 오 연출이 “그러면서도 반드시 지켜야할 것들은 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얘기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말을 보탰다. 이같은 스타일은 오세혁 연출 역시 마찬가지다.

“배우들, 연출님까지 머리를 맞대고 만드니까 모두의 작품이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무대에 올렸을 때 우리 모두가 정말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었죠.”

이진욱 감독의 말처럼 만들어진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배우들의 애정 역시 대단하기도 하다. 자신의 연습시간이 아닌데도 남아서 함께 자리를 지키는가 하면 다른 공연을 준비하면서 풀리지 않는 부분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우리 배우들이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요. 연출님은 항상 배우들이 ‘라흐마니노프’ 연습실에서는 좀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하세요. 배우들이 얼마나 스케줄이 많아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 배우들을 인상쓰면서 자꾸 잡아놓기 보다는 즐겁게 하면 좋겠다고 늘 말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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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역의 안재영(왼쪽)과 달 박사 김경수.(사진제공=HJ컬쳐)

‘라흐마니노프’와 ‘광염소타나’ 연습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김경수는 쉬는 시간에 이진욱 감독에게 피아노 연주법에 대해 지도를 받고 있다.

 

연극 ‘나쁜 자석’을 준비 중인 안재영은 오세혁 연출에게 이런저런 시도들에 대한 의견을 구하기도 한다. 

 

정동화 역시 다음 스케줄까지 비는 시간이면 연습실에 와 한두 시간씩 앉아서 음악을 듣기도 한단다.

“배우들은 기분이 좋으면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요. 시간이 이만큼 밖에 없는 사람한테 왜 그러냐고 하면 서로 힘들어져요. 무대는 배우들이 책임지는 건데 무대에서 못하겠어요? 당연히 열심히 해요. 경수가 ‘라흐마니노프’ 연습을 하는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감독님한테 피아노 연주를 지도받고 있는 장면을 보고는 감동받았죠.”

오세혁 연출의 말에 이진욱 감독은 “작품 ‘라흐마니노프’가 음악가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 만큼이나 애틋하다”고 털어놓는다.

“이 작품이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니 자꾸 여가시간까지 동원해서 뭐라도 더 해주고 싶고 그래요. 이런 걸 넣으면 행복하겠다 싶은 지점이 있어서 얘기를 하다보면 재밌고 또 다른 걸 생각하게 되고 그래요. 바로 공연 열흘 전에 만들어서 연습한 게 있는데…피아니스트들은 아우성이죠. 그 연주본을 연출님이랑 배우들한테 보여줬더니 정동화 배우가 너무 좋다고 반가워 해주고…그러면서 저 뿐 아니라 또 다들 행복해지죠.”


◇첫 장면 ‘교향곡’ 그리고 ‘기억 저편으로’부터 ‘안녕, 라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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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오세혁 연출.(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저는 라흐마니노프가 ‘불빛이 보여’라고 하는 ‘기억 저편으로’부터 ‘비가’, 달 박사가 ‘난 기억해’라고 하는 ‘옐레나’로 이어져 ‘피아노 협주곡 2번’이 1악장부터 연주될 마지막까지를 진실로 만들고 싶어요.”

‘기억 저편으로’ ‘비가’ ‘옐레나’ ‘안녕, 라흐’ 등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4개곡을 가장 눈여겨 봐달라는 오세혁 연출과는 반대로 이진욱 감독은 인트로와 첫 넘버 ‘교향곡’을 제일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누나를 위해 모든 걸 다 넣어서 만든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잖아요. 실제로 이 첫 넘버는 ‘교향곡 1번’이랑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만나게 만들었어요. 이걸 만들면서 ‘교향곡 1번’ 악보를 정말 많이 봤는데 라흐마니노프 악보는 매직아이 같아요. 보면 볼수록 정신이 나가죠. 그 악보를 보면 그가 뭘 공부했는지가 보여요. (토카타와) 푸가 대입법을 쓴 바흐 같은 것도 있고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등 자기가 알고 있는 걸 다 넣었죠. 그래서 전 ‘내가 얼마나 여기에 다 넣었는데…’라는 그 대사가 너무 좋았어요. 울분에 차서 이걸 만들려고 몸부림을 쳤다는 생각이 드니까 ‘교향곡 1번’ 악보만 봐도 너무 짠해져요. 그래서 좀 업그레이드를 했어요. 포즈들도 달라졌죠.”

이진욱 감독은 상처가 너무 심해 ‘교향곡 1번’ 악보를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는 죽을 때까지 열어 보지 않았거나 집세를 위해 오케스트라 지휘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했으나 할 수 없어 빈손으로 돌아오거나 톨스토이에 자문을 구하러 갔지만 면박만 당하고 돌아오는 등의 에피소드들을 전하며 애틋함과 안쓰러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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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이진욱 음악감독.(사진=최민석 기자 yullire@viva100.com)

 

“그런 에피소드들을 접하고 나니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만나는 그 지점이 어떤 감정이었을지 상상이 잘 안되면서도 눈물이 나고 아련해져요.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안 찾아지는 그 모습은 요즘 젊은 친구들과 비슷해 보여서 또 짠했죠.”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과도 같은 작품이다. 듣는 이에겐 평온하고 힐링이 되는 음악이지만 그 곡들을 만들기 위해 음악가 라흐마니노프가 겪었던 고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었을 터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오세혁 연출, 이진욱 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열정과 고민, 시시때때로 몰려드는 라흐마니노프와도 같은 우울증으로 완성했지만 관객들에겐 평화와 위안을 주는 작품이다.

2월 오세혁 연출과 이진욱 감독은 수현재컴퍼니의 통통통 최종작으로 선정된 뮤지컬 ‘까라마조프-대심문관’ 쇼케이스 공연을 함께 준비 중이다. 통통통은 플랫폼과 창작진, 관객이 소통해 함께 개발하는 우수 창작 개발 프로그램으로 ‘까라마조프-대심문관’는 김경주 시인이 대본을 집필했다.

“시작부터 관객들한테 터놓고 얘기하려고요. 우리도 모르는 게 많지만 꼭 가보고 싶다고…같이 공부하자고요. 정말 잘해보고 싶어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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