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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그라운드] 신구·박근형·박정자·김학철의 ‘고도’일지도 모를 ‘고도를 기다리며’

입력 2023-11-09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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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기다리며_기자간담회(사진제공_파크컴퍼니)(18)
‘고도를 기다리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오경택 연출(왼쪽부터), 에스트라공 역의 신구, 럭키 박정자, 블라디미르 박근형, 포조 김학철, 소년 김리안(사진제공=파크컴퍼니)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던 작품이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못했어요. 이 즈음에 그 기회가 오니까 이걸 놓쳐야 되느냐 해야 하느냐 저 나름대로 고심을 했죠. 그럼에도 제가 (하겠다고) 결정을 한 건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걸 놓치면 못한다 싶어 과욕을 좀 부렸습니다. 열심히 해볼게요.”

9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87세의 신구는 에스트라공(고고)으로 분할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Waiting for Godot, 12월 19~2024년 2월 1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출연 결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가 지난 여름 tvN ‘유 퀴즈 온더 블록’에서 “출연 여부를 두고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던 그 작품이다.  

 

고도를기다리며_기자간담회(사진제공_파크컴퍼니)(5)
‘고도를 기다리며’ 에스트라공 역의 신구(사진제공=파크컴퍼니)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대표작으로 패트릭 스튜어트, 이안 맥켈런, 로빈 윌리엄스, 스티브 마틴 등 유명 배우들도 무대에 오르게 했던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1969년 산울림극장의 임영웅 연출이 그의 아내인 오증자 번역가 역본으로 초연을 올린 후 1500회 이상 공연돼 22만여 관객을 만난 부조리극이다.

인간의 육체적, 탐욕적인 면을 상징하는 비관적인 인물 에스트라공(고고, 신구)과 지적이고 철학적이며 고도가 올 거라 믿는 낙천주의자 블라디미르(디디, 박근형)가 국도 옆 앙상한 나무 아래서 올 듯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야기다.

두 사람의 기다림에는 권위적이고 멋 부리기 좋아하는 포조(김학철), 그의 짐꾼이자 노예 럭키(박정자) 그리고 고도의 심부름꾼 소년(김리안)이 함께 한다.

신구 뿐 아니라 ‘고도를 기다리며’의 제작사 파크컴퍼니를 비롯한 공연계에서 그간 수많은 연극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선뜻 긍정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박근형 역시 “연극학부 시절부터 ‘고도를 기다리며’는 어떤 역이든 꼭 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젊었을 때 했어야 하는데 그 기회를 다 놓치고 자유극장 공연을 앞두고 연습하는 장면을 몇번 보기만 했어요. 그런 열망이 있었는데 해보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죠. 1년에 한번은 연극을 하겠다는 약속을 전혀 못지키다가 (연기생활) 40년이 지난 후에야 7년에 한번씩 연극을 하게 됐는데 너무나 운이 좋게도 ‘고도를 기다리며’ 출연 기회를 얻어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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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블라디미르 역의 박근형(사진제공=파크컴퍼니)

 

그렇게 박근형은 열망하던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디디) 역으로 출연을 결정하면서 “사실주의, 자연주의를 표방하며 연기생활을 하다가 너무 오랜만에 부조리극을 하게 되니 어떻게 할까가 가장 큰 숙제였다”고 밝혔다.

 

“오랜 연륜의 두분(신구·박정자)이 있어 걱정을 하나도 안해도 될 정도예요. 눈빛만 알고 움직임만 알아도 바로 할 수 있게끔 두분이 해주셔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무대에서 활동해온 박정자는 ‘고도를 기다리며’ 제작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럭키를 하겠다”고 자처해 오경택 연출과 제작사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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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럭키 역의 박정자(사진제공=파크컴퍼니)

 

박정자는 “오 연출도, 제작사도 저를 럭키로 캐스팅하지 않았다”며 “연극 ‘위기의 여자’ 때도 임영웅 선생님이 여주인공 캐스팅으로 고민하실 때 ‘박정자의 위기의 여자는 안되겠습니까’ 해서 결국 출연해 성공시켰다”고 털어놓았다. “어떤 럭키를 보여줄 것이냐”는 질문에는 “나도 궁금하다”고 답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두분 선생님(신구·박근형)과 같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준비하면서 연습실에서 훨씬 더 긴장해요. 두분이 너무 열심히 하셔서 제가 도전을 받아요. 이런 시간이 또 있을까 싶어요. 저도 60년 넘게 연극을 했지만 두분의 빛나는 연기를 보는 매순간이 감동입니다. 저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무슨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50여년간 무대에 올린 임영웅 연출에게 포조 역할을 수차례 제안받았지만 스케줄 등 여러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했던 김학철은 “이번에 포조로 출연제의를 받고 이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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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포조 역의 김학철(사진제공=파크컴퍼니)

 

“포조를 드디어 하는구나 싶었어요. 게다가 신구·박근형·박정자 선생님이 캐스팅되셨다는 얘기를 듣고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거기에 내가 낄 자격이 있나, 망신당하면 어쩌나…이렇게 긴장된 연극은 처음이에요. 연습하면서 몇 차례 도망가고 싶을 지경이었죠. 그 어떤 대하드라마보다 부담으로 다가오지만 사무엘 베케트가 우리에게 던진 큰 질문 하나 ‘고도는 과연 무엇인가’를 고통스럽지만 즐겁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어 김학철은 “어떤 배역보다 깜짝 놀랄 연기를 자신있게 선보이겠다”는 각오를 덧붙이기도 했다. ‘라스트세션’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러브레터’ ‘작은아씨들’ ‘킬미나우’ ‘레드북’ ‘레드’ ‘시티오브엔젤’ 등의 오경택 연출이 신구, 박근형, 박정자, 김학철, 김리안과 함께 꾸릴 2023년 ‘고도를 기다리며’의 특징 중 하나는 그간 남성들이 연기하던 럭키, 소년을 여자 배우가 소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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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오경택 연출(사진제공=파크컴퍼니)
사무엘 베케트는 1980년대 유럽의 몇몇 여성극단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리는 데 극렬히 반대했고 이를 어기고 공연을 한 네덜란드 극단과 법정소송을 벌일 정도로 젠더프리 캐스팅에 대한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왔다. 이에 ‘고도를 기다리며’는 젠더프리 캐스팅이 녹록치 않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오경택 연출은 “처음에 박정자 선생님이 ‘내가 럭키를 하겠다’고 하셨을 때 저희는 정말 뒤통수를 세게 맞는 것 같았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도전인데 너무 좋을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 자체가 가진 그 보편성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지 배우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여년 임영웅 연출이 꾸준히 무대에 올려온 ‘고도를 기다리며’를 새로 연출하게 된 데 대해 오경택 연출은 “임영웅 선생님 무대를 보면서 굉장히 명쾌하고 교과서적인 연출의 정석을 공부한 한 사람으로서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차이점을 내기 위해 일부러 뭔가를 새롭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1970년대 베케트가 직접 연출하며 변주한 프로덕션을 바탕으로 동시대에 맞는 대사, 장면 등이 적용되죠.”

이어 “본인이 썼고 연출한 프로덕션이라면 작가의 의도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는 판단 하에 그것을 기준으로 작업 중”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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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기자간담회(사진제공=파크컴퍼니)

 

“더불어 저는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작품 안에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연출적으로 다르게 해석하기 보다는 대본을 충실하게 따르다 보면 선생님들이 그 간 배우로서 쌓아오신 시간의 힘들이 충돌하며 굉장히 다른 느낌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고도’를 묻는 질문에 신구는 “고도는 실체가 없다. 형체도, 형태도 없는 그 존재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매일을 보낸다”며 “오늘은 못오지만 내일은 올 거라는 메시지를 기다리면서 50년을 같이 지낸다”고 설명했다.

“그런 변화없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구나 싶어요. 그 고도가 시든 자유든 희망이든 꽉 채워지지 않으니 매일 쫓고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함으로서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지금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건 그런 희망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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