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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에 취하다] 거리에서 사라진 군고구마… 너를 품고 돌아오는 길은 따뜻했다

[아날로그에 취하다] 군고구마

입력 2015-02-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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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터덜, 피곤에 절은 퇴근길에 들어선 골목 어귀에 모락모락 하얀 김을 내뿜는 군고구마통이 반긴다. 못생기기도 했다. 하물며 군데군데 멍든 것마냥 까맣게 탔다.

 

그러나 껍질만 벗기면 노란 속살에 꼴깍 침이 넘어간다. 선 채로 바로 먹으면 맛좋은 간식이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빨갛게 잘 익은 김장김치를 척 얹어 먹거나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국물을 함께 들이켜면 든든한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장갑을 껴도 손이 곱을 것처럼 추운 겨울날, 퇴근길의 군고구마 봉지는 손난로 대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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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고구마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겨울철 대표 별미다. 어렵고 못살던 시절에는 간식으로 군고구마를 먹는 건 사치였다.

한국전쟁 직후 서민들의 삶을 그린 김원일 소설 ‘마당깊은 집’(1988)에서는 상이군인인 준호아버지가 군고구마 리어카를 인수했을 때 상대적으로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치기공사 홍규가 애인에게 군고구마와 풀빵을 사주며 부를 과시하는 장면이 묘사됐다. 

 

반면 늘 먹을 게 부족한 주인공 길남은 어쩌다 고구마를 얻어먹으면 누가 볼세라, 허겁지겁 먹다 목이 메곤 했다. 지독하게 아꼈던 준호네 부부는 군고구마 장수와 행상 등으로 경북대 후문에 작은 서점을 마련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80대 김씨 할아버지는 소설 속 준호 아버지처럼 군고구마로 자식 넷을 대학에 보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47년 동안 ‘고구마 외길’을 걸었다는 김씨의 네 자녀는 모두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 큰 딸은 이화여대,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인하대학교 공대, 한양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아직 시집을 못 갔다는 막내딸은 은행에 다니는 ‘골드미스’다.

“내가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와 오로지 ‘고구마’만 팔았어요. 광화문에서 고구마튀김을 처음으로 팔기 시작한 사람도 나야. 자식 넷 다 대학 보냈어, 큰딸은 이대 나와서 시집 갔고 둘째 아들은 직원이 200명도 넘는 무역회사 사장님이야. 막내딸은 은행 차장님인데 어찌나 일을 야무지게 잘하는지 남자도 안 가는 출장, 혼자서 다 가곤 해. 그런데 시집을 못 갔어. 여기서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는 거 신문에 나오면 큰일 나. 자식들이 아버지 광화문 좀 제발 그만 나가라고 성화야.” 

 

 

아날로그_군고구마5
광화문에서 처음 군고구마를 팔기 시작해 47년 외길을 걸어온 김씨 할아버지의 통에는 못생겼지만 껍질만 벗기면 노란 속살을 드러내는 고구마가 익어간다. 그렇게 낮 동안 익은 고구마는 퇴근시간에 들르는 단골들의 가슴에 따스한 정을 안긴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지만 자식자랑을 하는 순간만큼은 김씨의 굽은 허리가 자부심으로 쭉 펴진 듯했다. 김씨와 인터뷰를 한 날은 서울의 아침 체감기온이 영하 15도까지 내려간 날이었다. 

 

김씨는 “추위를 잘 안 타는 편이라 군고구마 장수가 제격”이라며 웃어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사진이 신문에 나오면 안 된다며 한사코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 

 

그는 군고구마 5000원 어치를 달라고 하자 소담스럽게 구워진 고구마 5개를 하얀 종이봉투에 담았다. 고구마가 실하다고 칭찬하자 날 고구마를 깎아먹으면 더욱 맛있다며 굽지 않은 고구마를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그렇게 언제나 고구마의 온기와 함께 덤처럼 정이 따라온다.

한때 사치스러운 간식이자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던 고구마. 

 

1980년대 경제부흥이 인 뒤에도 고구마는 서민들의 퇴근길 가장 반가운 간식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거리에서 좀처럼 고구마를 만나기 어렵다. 고구마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00년, 도매가로 1㎏에 913원이었던 고구마가 2012년 3614원까지 상승했다. 지난해엔 2310원으로 하락했지만 예년에 비해 두배 이상 오른 가격이다.

고구마를 굽기 위해 사용하는 엘피지 가스 가격 상승도 상인들을 울리는 요인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군고구마 장수들이 사용하는 엘피지 가스 한 통은 4만5000원 선. 가스 한 통을 나흘 정도 사용하니 하루에 1만원 가량 비용이 더 나가는 셈이다. 

 

땔감으로 구우면 맛도 좋고 비용도 줄지만 연기가 심하다는 인근 상인들의 항의가 만만치 않다. 길거리 식품에 대한 상인들의 견제도 거리 군고구마 장사를 포기하게 만든다.

서울 중구 황학동 중앙시장에서 군고구마통과 리어카를 함께 판매하는 형제만물의 배준영(38) 대리는 “예전에는 군고구마로 생계를 잇거나 학생들이 학업을 위해 겨울철 아르바이트로 군고구마통을 많이 찾았다”며 “하지만 이제는 군고구마 장사로 생계를 잇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고 말한다. 

 

배 대리는 “요즘은 복고풍이 유행하면서 서울 강남의 음식점들이 서비스로 군고구마를 구워주거나 인테리어용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군고구마통을 많이 찾는다”고도 귀띔한다.

실제로 경복궁 통인시장부터 광화문 세종문화회관까지 걸어오며 만난 군고구마 장수는 김씨 할아버지 한 명뿐이었다. 밤이면 금천교 시장 입구에 군고구마 장수가 등장하지만 그 주위에서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김씨는 “고구마만 팔아먹고 살기 어려우니 함께 고구마를 팔던 사람들도 다 어디론가 사라졌다”며 “나도 날이 추워 고구마가 잘 팔릴 것 같아 나왔지, 날씨가 안 추우면 고구마도 안 팔린다”고 하소연이다. 아스라히 사라져가는 옛 것에 대한 기억과 함께 군고구마의 정도 사그라지고 있다.

브릿지경제 = 조은별 기자 mulgae@viva100.com 

사진=허미선, 김동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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