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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의 스토리가 있는 여행] 변방 고을이 대표 도시로… 德 품은 천년 역사

[논어 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역사기행] ④대전

입력 2021-07-26 07:20 | 신문게재 2021-07-2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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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으로 다스리면 백성은 절로 따라온다 ‘회덕회토(懷德懷土)’ 

 

子曰(자왈), 君子懷德(군자회덕) 小人懷土(소인회토) 君子懷刑(군자회형) 小人懷惠(소인회혜).

공자께서 “군자는 베풀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편하게 살 방도를 추구하며, 군자는 법도를 생각하고 소인은 혜택 받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셨다.

 

대전 동춘당
대전 동춘당. 사진=남민

 

 

◇ 임금의 반성을 촉구한 송준길

회덕회토란 ‘군자(君子), 즉 지도자는 훌륭한 덕을 갖추려 하고 백성은 눈앞의 이익과 편히 살 것을 생각하며, 군자는 법도에 맞는 통치를 생각하고 소인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혜택만을 소망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도자는 우선 백성들에게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고, 그런 다음 가르쳐야 한다는 게 공자의 가르침이다.

그런 점에서 동춘당 송준길(宋浚吉)만큼 ‘회덕회토(懷德懷土)’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한 인물도 드물다. 그는 인과 덕, 예를 품고 살면서 오로지 위로는 임금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주린 백성들이 흩어질까 걱정뿐이었다. 병자호란 후 30년이 다 되도록 백성들이 여전히 굶주림으로 도탄에 빠져 있던 시절, 1665년 벼슬길에서 물러나온 송준길은 자신이 가르쳤던 현종(顯宗)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즉시 세금을 탕감하고, 내탕고와 각 고을의 창고를 열어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임금 한 사람의 마음이 만화(萬化)의 근원입니다. 마음을 확립시켜 큰일을 하시고 구병(舊病, 과거의 잘못)을 혁거하십시요. 하늘 탓으로 돌리지 말고 현 상황을 핑계 대지도 말 것이며 방본(邦本,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하시어 세도(世道)를 만회하시길 스스로 기약하소서”라고 청했다.

송준길은 “지난 10년 동안 나라가 도탄에 빠져 있다”며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해 임금의 반성을 촉구했다. “군자 가운데 등용되지 않은 자가 있고, 소인 가운데 혹 제거되지 않은 자가 있어서입니까? 대신이 그 직책을 상실하고, 천한 자가 정권을 훔쳐서 입니까? 남을 책망하는 데는 밝으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데는 지극히 못해서입니까? 이런 후 반드시 재이(災異)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소문에 대해 현종은 조정에서 상의 후 조치하겠다고 답했다.

1659년 송준길의 고향 회덕현에 조이숙이라는 어진 현감이 부임했다. 대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관아로 가득 몰려왔다. 조 현감은 해진 옷을 입고 이듬해까지 자신의 녹봉마저 구휼하는 데 사용하며 백성들을 돌보다 끝내 순직했다. 백성들은 통곡하며 불망비를 세워 추모했다. 이때 당대의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거사비명(去思碑銘)까지 세워 그를 기렸다.

이 회덕(懷德)이 오늘날 대전의 모태가 된 곳이다.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일대다.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갈라지는 ‘회덕분기점’으로 잘 알려진 지명이다. 1000년이 넘은 이 지명의 역사 속에서 덕을 품고 인으로 보듬어 온 고장이다. ‘대덕’이란 말도 대전과 회덕에서 따온 말로, ‘큰 덕(大德)’을 품은 땅이라는 의미다. 한때 공주(公州) 관할의 작은 변방 고을이던 곳이 1904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 철도가 생기면서 충남의 대표 도시로 부상했다. ‘덕(德)’이 사람을 불러 모은 것이다.
 

대전 동춘당 선생 고택
대전 동춘당 선생 고택. 사진=남민

 


◇ 죽는 순간까지 예를 갖춘 ‘예학종장’

송준길은 160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 송이창(宋爾昌)을 따라 회덕으로 내려왔다. 어려서부터 눈매가 아름답고 봉황 같이 잘생긴 용모로 시선을 끌었으나 그는 언제나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자세로 침착하며 올곧은 품행을 유지했다고 한다.

송준길은 효종(孝宗)과 현종의 스승이었다. 숙종(肅宗)에게도 원자 시절에 가르침을 전해 ‘왕의 스승’으로 유명했다. 당대 명필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대제학을 역임한 문신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사위가 되었고, 숙종의 계비이자 장희빈에 의해 시련을 겪었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그의 외손녀이다.

한 살 아래 우암 송시열과는 친척이다. 옥천 외가에서 태어나 8살 때 회덕으로 온 송시열이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공부했다. 송시열이 다 해진 옷을 입고 있으면 자신의 옷을 벗어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송시열과 함께 국정을 주도하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평생 동지로 살았지만 송시열의 그늘에 가려진 편이다.

송시열(宋時烈)은 송준길의 됨됨이를 흠모했다. “서로 매우 아끼고 좋아했다. 옥천의 전곽사우(全郭祠宇)를 철거하는 일에 끝내 서로 양보하지 않아 얼굴까지 붉혔지만, 후에 공(송준길)이 임금 앞에서 결국 내 말을 채택해줬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빈틈이 없고 상세했으며 자기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이 이와 같았다”며 극찬했다.

67세 인생의 마지막 날, 그는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았다. 주변 사람들이 편히 앉기를 청했으나 “이렇게 앉지 않으면 불안하다”며 예학(禮學)의 종장(宗匠)을 뒤이은 거장다운 모습으로, 스스로에게도 예를 받들어 생을 마감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됐다.

 

대전 동춘당 사당 별묘
대전 동춘당 사당 별묘. 사진=남민

 


◇ 회덕회토 송준길의 ‘동춘당’… “늘 봄만 같아라”

동춘당 집안이 회덕에 정착한 것은 7대조 쌍청공 유(愉)가 조선 태종 때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살면서 시작됐다. 그때 집이 쌍청당(雙淸堂)으로, 지금도 대전 중리동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송촌(宋村)이라 불렀고 지금도 대전시 송촌동으로 이어가고 있다. 송촌동 일대 아파트는 ‘선비마을’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데 바로 송준길을 비롯한 은진 송씨 집안 선비들의 세거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쌍청당에서 동쪽으로 2km 거리에 송준길의 부친 송이창이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된 당(堂) 한 채를 지었다. 병자년(1636년) 이후 허물어진 것을 송준길이 1643년 봄 동쪽 개울가에 옮겨 짓고 ‘동춘(同春)’이란 당호를 내걸었다. ‘만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호도 ‘동춘당(同春堂)’이라 불렀다.

좌의정을 역임한 조익(趙翼)은 “동춘이란 말 속에는 ‘봄은 만물을 낳는 기운이므로, 이는 곧 인을 추구한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회덕(懷德)’을 뜻하는 말이다. 실제로 송준길은 송시열·송규렴과 함께 회덕에 처음으로 향약을 보급해 주민들의 활로를 모색했다.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항상 지역 사회와 민생을 챙겼다.

동춘당은 작지만 아름다운 한옥이다. 단아하다는 느낌이 절로 들어 조선 중기 충청도 선비의 기풍이 묻어난다. 보물로 지정된 집이다. 정면 3칸 중 왼쪽 1칸은 온돌방이고 나머지 2칸은 대청마루다. 건물의 동서남북 문이 모두 크기와 기능을 달리해 특이하다. 정면인 남쪽 대청 2칸의 문은 여름철 개방을 위해 큰 문으로 달았고 방문은 황토벽 가운데 아담하게 달았다.

동쪽은 햇빛의 눈부심을 막기 위해 나무판자로 가림막식 벽을 했다. 북쪽은 북풍을 막으려 문을 작게 했다. 담장 너머 골목이 있어 왕래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서쪽 문은 아주 작게 만들었다. 문 하나 하나에도 기능성을 부여한 지혜가 돋보인다. 굴뚝은 보통 집들과 달리 서쪽 벽 아래 구멍으로 만들어 겸허함을 표현했다.

 

대전 동춘당 현판
대전 동춘당 현판. 사진=남민

 


‘동춘당’ 현판 글씨는 인생 동반자였던 송시열이 송준길의 곧은 성격을 묘사하듯 정성껏 또박또박 썼다. 현판 맨 왼쪽 작은 글씨 ‘화양동주(華陽洞主)’는 송시열의 호 중 하나다. 담장 밖 노송마저 예학의 종장에게 예를 갖춘 모습이다. 담장이 낮은 것도 송준길의 정신을 잘 반영한다. 골목 안쪽에 사랑채 및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 송준길의 집이 있고, 우측에 보기 드물게 두 개의 사당이 있다. 4대조까지 모신 가묘(家廟)와 송준길 선생만 따로 한 번 더 모신 별묘(別廟)를 갖춘 것이다.

  

◇ 대전에 가볼 만한 또 다른 곳들

 

회덕에는 일찍부터 성리학의 싹이 트고 있었다. 조선 전기에 박팽년(朴彭年)과 김정(金淨)을 배출했고 후기엔 송준길과 송시열로 이어졌다. 가양동에는 박팽년 유허 비각이 있다. 

 

조선 초기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회덕향교는 관아 북쪽 산비탈에 있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 4현(주돈이·정호·정이·주희)과 우리나라 18현(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준길·송시열·박세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전 회덕향교
대전 회덕향교 전경. 사진=남민

 


 

송준길·송시열과 함께 ‘회덕삼송’으로 불리는 제월당 송규렴의 집 제월당과 옥오재 또한 ‘회덕’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제월당은 별당이며, 옥오재는 사랑채다. 송시열의 유적은 우암사적공원에 있다. 아름다운 연못을 가진 정자 남간정사(南澗精舍)가 있다. ‘양지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이라는 의미로 <주자>의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따왔다. 실제로 뒤뜰 샘물을 건물 밑으로 흐르게 설계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선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 사적공원 장판각엔 송시열의 문집을 발행한 ‘송자대전(宋子大全)’ 목판이 보관돼 있다. 

 

대전 송시열의 남간정사
대전 송시열의 남간정사. 사진=남민

 

과거 대전의 중심지였던 은행동·선화동 일대를 ‘은행나무 아래 정자’가 있었다고 ‘으능정이’라 불렀다. 대전의 빵집 성심당, 대흥동 성당 등 화랑·공연장·전시실·골동품점 등 문화예술 관련 업소들이 빼곡한 ‘대전 원도심’이다. 그 한켠에는 80년 역사의 옛 충남도청 건물이 1km 직선 도로 중앙로를 따라 대전역과 마주 보며 서 있다. 충남도청이 2013년 내포 신도시로 옮겨가면서 옛 청사는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으로 변신했다. 등록문화재로 등재돼 있다.

 

맨발로 땅과 교감을 나누는 ‘계족산 황톳길’도 유명하다. 산 능선 14.5km의 황톳길을 걸으며 잠시 태초의 자연 속에 잠겨본다. 대전 지역 소주업체 맥키스컴퍼니(구 선양) 조웅래 회장이 회덕 경영철학을 이어 ‘사람과 사람 사이(Link Tommorrow)’ 기업 이념으로 조성했다. 

 

글·사진=남민 인문여행 작가 sunto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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